자 유 게 시 판

천축사 이모저모 4
이송영
2019-10-14
조회 3

지효스님

성운지효(聖雲智曉, 1909~1989) 대선사는 부산 범어사로 출가해 범어사에서 열반한 ‘범어사의 어른’이다. 범어사의 위상을 곧추세우고 이를 굳게 지켜나가기에 평생을 노심초사했다. 범어사의 위상은 곧 일주문에 의연하게 내보이는 선찰대본산(禪刹大本山). 스님은 청정비구로서 일관된 삶을 살았으며 임종 직전까지도 참선정진에 몰두했다. 범어사의 청정수행 가풍은 조계종의 정체성 확립을 위한 종단정화라는 한 시대의 격랑과 맞물려있다. 불교정화운동의 주역인 동산(東山)스님이 지효스님의 은사이다.

지효스님은 은사 생전에 곁에서 모셨고 스승의 열반 이후 범어사를 이끌었다. 은사의 유지를 누구보다 잘 헤아린 스님이기에 범어사의 위상 견지(堅持)에 심력을 다했다. 지효스님의 일생을 이를 때 몇 구절로 요약되는 말이 있다. 불교정화의 큰 뜻을 이루기 위해 위법망구(爲法忘軀)의 정신으로 할복한 분, 평생 법상(法床)에 오르지 않은 분, 도봉산 천축사 무문관(無門關)의 6년 고행을 성만한 분으로 크게 요약된다. 이를 한마디로 말하면 ‘지효스님은 청정비구로서 수좌정신을 곧추세우고 몸소 실천하신 수행자의 사표(師表)’ 다.


지효스님은 1909년 평안남도 안주군 신안주면 운흥리에서 태어났다. 속명은 김지효. 1943년 범어사로 출가해 1944년 동산스님을 은사로 사미계, 1946년 비구계를 받았다. 법명은 속명 그대로 ‘지효’이고 법호는 ‘성운’이다. 1947년 범어사 강원 대교과를 졸업하고 범어사를 비롯해 해인사 통도사 등 전국 선원에서 참선수행을 했다. 스님의 참선정진은 이때부터 평생 그치지 않았다. 1955년 6월에는 할복으로 불교정화의 대의(大義)를 널리 알렸다. 불교정화는 일제시대의 불교, 이른바 왜색불교인 대처승제도를 없애고 청정비구종단으로 한국불교의 위상을 바로잡자는 뜻으로 당시 비구 스님이 뭉쳐서 벌였다. ‘불법(佛法)에 대처승(帶妻僧)없다’는 기치아래 비구 스님들은 불교정화운동을 일으켰고 당시 대처승들은 이에 맞서 양자 간에 치열한 공방이 벌어졌다.


당시 태고사(현 조계사)에 비구 비구니 스님들이 뜻을 관철하기 위해 법당에 모여 단식농성을 벌이고 있을 때였다. 대처승들은 이를 저지하려고 폭력배를 동원, 농성중인 스님들께 무자비한 폭력을 휘둘렀다. 폭력배들은 ‘하동산 잡아라’ ‘이효봉 끌어내라’ 며 설쳤고 스님들은 ‘큰스님 지켜라’며 폭력배가 휘두르는 몽둥이를 몸으로 막으며 어른 스님을 에워쌌다. 이 난장판을 보다 못한 지효스님은 할복을 결행했다. 스님은 병원에 실려 가서 수술을 할 때도 마취를 하지 않았다. 병원에서 스님을 간호하던 한 간호사는 스님에게 감복해 출가를 했다. 스님은 그후 간혹 그 때 상흔의 여진을 겪었다고 한다.


스님이 천축사 무문관에 들어간 때는 1966년이다. 부처님의 6년 고행을 본받아 목숨 걸고 정진하자는 굳은 결의로 난행고행을 결행했다. 뜻을 같이한 스님들은 여러분 있었으나 6년 을 다 채운 스님은 지효스님을 비롯해 몇 명이라 전해지고 있다. 무문관 수행은 1962년 비구 대처간의 오랜 쟁투를 마무리하고 1962년 통합종단이란 이름으로 출범한 이후 청정수행 가풍을 진작하기 위해 이뤄졌다. 지효스님을 은사로 모신 홍선스님(범어사 주석)은 스승의 할복과 무문관 수행을 누구보다 잘 안다. 홍선스님은 태고사 법당에 모인 스님들의 불교정화에 대한 의지와 그 실현을 향한 결기에 출가수행자로서의 스스로의 마음가짐을 새롭게 했으며 출가수행자의 길을 새삼 다지게 됐다고 한다. 더구나 당신의 은사가 몸소 보여준 출가수행자 본연의 모습은 스승이 가신 후에도 마음에 깊이 새겨졌다고 회상한다.


지효스님이 평생 법상에 올라 법문을 하지 않은데 대해서 아랫사람들은 ‘그 어른께서 그러셨다’는 말만 전하고 있다. ‘왜 그러셨을까’에 대해서는 꼬집어 말하지는 않고 있다. 당신이 그럴 때는 나름의 의중이 있지 않았겠느냐고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그러나 필자는 그에 대한 궁금증을 접을 수 없어 무비스님에게 직설적으로 물었다. 무비스님은 “잘은 모르지만 아마 스님께서는 당신이 확철대오 했다는 마음이 들기 전에는 법문하지 않겠다고 작심하신 게 아니겠느냐”고 했다.


지효스님의 의중은 헤아리기 어려우나 당대의 큰 어른으로서 평생토록 법상에 오르지 않았다는 사실은 후학들에게 많은 생각을 갖게 하는 대목이다.


지효스님은 상당법문은 하지 않았으나 수좌들과 다담(茶談)을 나눌 때나 작은 공간에서 대화를 할 때 상대방을 설득하는 힘은 큰 울림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고인이 된 통광스님이 들려준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다. 통광스님은 당신이 출가하게 된 결정적 인연은 지효스님의 영향이라 했다. 한의사가 되려고 책 보따리를 싸서 하동 칠불암에 갔는데 한 스님이 계셨다. 눈처럼 하얀 눈썹이 날카롭게 뻗어있는데 표정은 자상한 스님이 ‘젊은이는 무엇 때문에 절에 왔느냐’고 물었다. 한의사가 되겠다고 하니 왜 그런 마음을 갖게 됐느냐고 되묻기에 많은 생명을 살리려고 한다 하니 그 스님은 의사가 되어 생명을 살리는 것도 좋지만 의사보다 더 많은 생명을 살리는 사람이 되어보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그 말에 끌린 젊은이는 어떻게 하면 그런 사람이 되겠느냐고 물었고 스님은 부처님과 부처님의 길을 자상하게 일러주셨다. 그 말씀에 젊은이는 한의사의 꿈을 접고 출가사문이 됐다고 했다.


行 狀


1909년 5월8일 평안남도 안주군 신안주면 연안 김공 문선거사를 부친으로 김씨경 보살을 모친으로 출생


1943년 부산 범어사에서 동산스님을 은사로 득도


1944년 부산 범어사에서 사미계 수지


1946년 부산 범어사에서 보살계 및 비구계


1947년 범어사 대교과 졸업


1954년 범어사 수선안거 이래 해인사 통도사 등 전국 각지 선원에서 수선안거


1955년 6월10일 불교정화불사 성취 기원 큰 뜻을 품고 위법망구의 실현으로 조계사 법당에서 할복


1955~1956년 총무원 총무부장


1957~1959년 총무원 재무부장


1959년 석굴암 주지


1961년 범어사 주지


1962년 1월15일 동산스님으로부터 전법 건당, 법호 성운. 은법 제자는 여환 홍선 허현 일원 관조 지형 광진 등


1962년 석굴암 주지


1963~1964년 불국사 주지


1965~1967년 범어사 주지


1966~1972년 서울 천축사 무문관에서 당시 현구 경산 관응 제선 스님 등과 더불어 6년간 수선 안거.


1972~1977년 감찰원장


1973~1976 영월 법흥사 주지


1978년 원로의원


1979~1980년 동화사에서 수선 안거


1980~1982년 해인사에서 수선 안거


1982~1986년 범어사 주지 역임


1982년부터 범어사 극락암 주석.


1989년 9월28일 (음력 8월29일) 오전 3시10분 범어사 극락암에서 세수 81세, 법랍 47세로 열반.


천축사 무문관 6년


폐관정진 완벽성만


“공부 열심히 해야 해.” 지효스님이 늘상 후학들에게 일러준 말씀이다. 당신은 몸소 이를 후학들에게 보였다.


대중이 선방에서 정진하다가 방선시간에 지대방에서 잠깐 쉴 때도 스님의 경책을 벗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지대방에서 잡담 소리가 들려오는 그 자리에서는 스님의 할(喝)이 내렸다고 한다. 당신 상좌인 선재스님(범어사 계명암 주지)에게 “저기 가서 잡담하는 수좌에게 ‘왜 중 됐느냐’고 물어봐라”라고 하셨다. 지효스님은 당신의 은사인 동산스님 열반(1965년) 이후 주지를 맡아 범어사를 지키고 범어사의 앞날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선재스님은 “노스님(동산스님)이 떠나신 후 스님(지효스님)께서는 큰 책임감을 느끼셨던 것 같다”고 했다. 어떻게 하면 동산노사의 빈자리를 메꿀까 하는 걱정이 아니었겠느냐고 했다.


평생토록 좌복 위에 곧추 앉아 정진했고 노년에 기력이 쇠잔해 큰 방에서 대중들과 함께 정진하지 못하게 됐을 때 혼자서도 당신 방에서 정진한 스님. 그토록 정진에 대한 일념으로 지낸 분이 ‘선찰대본산’이란 범어사의 위상을 곧추세우고 굳게 지녀 가는데 대한 구상을 놓을 수 없었고 또 그러한 당신의 구상을 큰 책임감으로 갖게 되지 않았겠느냐는 말이다.


평소 맡은 일에 대한 책임감이 컸던 스님.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거짓말은 용납하지 않은 스님. 아랫사람이 잘못한 일도 당신의 잘못으로 말하면서 아랫사람을 감싸주고 허물을 덮어 주던 스님. 그런 스님이지만 계법(戒法)에 어긋한 행동을 하는 수행자에게는 칼날 같이 엄했다고 한다. 종단 감찰원장 시절 한 스님이 종로에서 술을 먹었다. 스님은 당장 불러오라고 호통 쳤고 불려온 그 스님의 옷을 벗기고 예비군복 입혀서 내쫓고 승적을 없애라 하셨단다. 지효스님의 용심(用心)의 한 자락을 엿볼 수 있는 일화라 하겠다.


선재스님은 어린 나이에 출가해 스승의 임종을 지킨 상좌다. 선재스님이 은사의 친필이라면서 필자에게 보인 글이 있다.


산중선정무위난(山中禪定無爲難)


대경부동시위난(對境不動是爲難)


가언불언대인행 (可言不言大人行)


난행능행보살행 (難行能行菩薩行)


“산중에서 선정을 닦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경계를 만나 움직이지 않는 마음이 참으로 어렵도다. 할 말을 하지 않는 것은 대인의 행이요, 어려운 행을 능히 하는 것은 보살의 행이로다.”


선재스님은 이 글귀가 서산대사의 글이라 한다. 그러나 필자에게는 지효스님을 이르는 데는 바로 이 글귀가 어찌 그리 맞아떨어지는 말이 아니냐는 느낌이다.


도움말: 홍선스님, 선재스님 사진 관조스님


[불교신문3172호/2016년1월27일자]


이송영
2019-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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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선스님


제선 스님은 한국 불교계에서 아주 특이한 존재다. 그동안 그의 행적은 베일에 싸여 있었다. 어느날 갑자기 종적을 감춰버려서 생사조차 알 길 없다. 하지만 한번 앉으면 바위처럼 꿈쩍 않는 그의 ‘수행력’은 추종을 불허했고, 생애 또한 극적이었다고 한다. 선승들 사이에선 ‘가장 철두철미했던 수행자’로 언급되곤 한다.


한국 불교에는 ‘무문관(無門關)’이라는 이름의 독특한 수행처가 있다. 밥이 드나드는 구멍만 남기고 출입문까지 자물쇠로 채워 봉쇄한 방이다. 이 무문관을 처음 만들고, 그곳에서 면벽수행을 한 이가 제선이다. 바로 서울 도봉산 미륵봉 기암 아래 숨어 있는 천축사 무문관이다. 대리석으로 지은 3층 집으로 지금은 시민선방으로 쓰고 있다.


제선 스님은 제주에서 태어났다. 15살 때 일본에 유학했다. 오사카 시내에 사는 삼촌 집에 들르면 늘 반겨주던 개가 있었다. 이 개가 병이 들자 삼촌이 시키는 대로 교외에 내다버렸다. 도쿄 메이지대학을 중퇴하고 고향에 돌아와 결혼해서 아들을 낳았다. 그러나 애지중지하던 아들이 갑자기 병이 들어 숨을 거뒀다. 절망에 빠진 그는 전국 유람 길에 나섰다. 한 번은 죽기로 작정하고 금강산 봉우리에서 몸을 던졌지만 상처 하나 입지 않고 깨어났다고 한다.


그러다가 지리산 산청의 토굴에서 21일간 기도를 했다. 그 마지막날 비몽사몽간에 아들과 상봉한다. 너무 반가워서 쫓아갔는데 아들이 개로 변하는 것 아닌가. 일본에서 버린 개였다. 개가 아들로 태어나 온갖 애를 태우고 떠난 것이다. 그는 ‘인과응보’의 도리를 깨닫고 출가를 결심한다.


그는 1937년 지리산 칠불암에서 혜천 스님을 스승으로 삼아 스님이 된다. 그와 동갑이었던 혜천 스님은 이미 ‘지리산 도인’으로 유명했다. 제선은 오대산 상원사, 논산 관촉사, 남해 보리암, 도봉산 망월사 등에서 깊은 수행을 했다. 심지어는 ‘실질적으로 얼마나 힘을 갖췄는지 테스트 해보자’며 화장(自火葬)을 시도하기도 했다. 장작더미에 불을 붙이고 그 위에 올라앉았다가 깊은 화상을 입고 만다.


제선은 ‘출가 도반’인 천축사 주지 정영 스님을 설득해 무문관을 세운다. 1965년 그는 부처님의 설산고행(雪山苦行)을 좇아, 6년을 작정하고 한 평 방에서 한 번도 나오지 않는 폐관정진(閉關精進)에 들어갔다. 제선은 “부처님과 같은 실제 힘을 기르기 전에는 나서지 않겠다”며 스스로 지독한 독방 감옥살이를 했다. 제선과 함께 무문관에 든 수행자는 6명이었다고 한다.


제선 스님은 1971년 5월5일 약속했던 6년을 하루도 어기지 않고 끝마쳤다. 당시 기한을 다 채운 이는 제선과 뒷날 직지사 조실을 지낸 관응 스님(1910~2003)뿐이었다고 한다. 언론사들이 앞다퉈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응하지 않았다. 무문관을 나오자마자 점심 공양을 한 뒤 사제인 혜원 스님의 배웅을 받고 조용히 산을 내려갔다. 조카상좌 일화 스님만 데리고 부산으로 간 제선 스님은 홀로 여수행 배에 몸을 실었다고 한다. 그러고는 홀연히 자취를 감춰버렸다. 그의 도반과 제자들이 전국으로 찾아다녔지만 허사였다.


최초 ‘처절한 수행’ 뒤 홀연히 사라진 제선 스님 재조명

제선 탄생 100주년을 맞아 황산 스님 등 제선문도회가 펴낸 <무문관 수행의 전설, 석영당 제선선사>(비움과소통) 이야기다. 불교신문사 박부영 기자가 여러 증언들을 발굴·취재해 제선의 삶과 구도행각을 재구성했다.



무문관 수행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설 만큼 혹독하다고 한다. 모든 것을 내던져 ‘깨달음’을 얻겠다는 각오 없이는 시작도 할 수 없다. 1972년 시작된 제2차 천축사 무문관 수행에서도 구암·원공 스님만 6년 기한을 채웠다고 한다. 그런데도 요즘 천축사 수행을 따르려는 또 다른 무문관들이 늘어나고 있다. 제선과 함께 천축사 무문관을 열었던 정영 스님이 1983년 개설한 공주 갑사 대자암 ‘삼매당’에 이어 1994년 제주 ‘남극선원’, 1998년 설악산 백담사 ‘무금선원’, 2004년 천성산 조계암, 2005년 경주 감포의 무일선원이 무문관 수행을 시작했다. 요즘은 스님들뿐만 아니라 일반 신자들도 세상과의 ‘자기 단절’을 통해 ‘참다운 자기’를 찾는 무문관 수행을 들어간다. 이래저래 ‘전설’의 옷을 벗고 새롭게 주목받는 제선 스님이다.



이송영
2019-10-13
조회 2

구암스님


구암스님 (하남 광덕사) “나쁜짓 말고 힘써 선행하라” 세살 아이도 아는데 실천못할 뿐

*약력 ·1918년 목포 生 ·효봉스님을 은사로 충무 미래사에서 출가 ·60년 자운스님을 계 사로 사미계 수지 ·66년 자운스님을 계사로 비구계 및 보살계 수지 ·해인사 15안거 성만을 비롯 동화사 통도사 등 제방 선원서 수행 ·72년부터 78년 천축사 무문관서 6년 두문불출 정진 · 경기도 하남 광덕사에 주석 경기도 하남 남한산 기슭의 작은 절 광덕사. 중부고속도로 진입로를 새로 내느라 절 밖은 세상처럼 소란스럽다. 공사장을 뒤로 하고 살짝 길을 틀어 산길로 접어드니 전나무가 쭉쭉 시원스레 하늘로 뻗어 있다. 천축사 무문관에서의 6년 수행 이후 제방 선원에서 선수행에 몰두해오신 구암스님께 큰 절 올리고 길을 여쭈었다. 구암스님은 “이미 선인들이 모든 가르침을 주셨는데, 단지 행하지 않을 뿐. 그러니 더 보탤 게 없다”고 말씀했다. 산을 울리는 일갈은 아니었지만, 가슴이 뜨끔했다. 스님은 특히 어머니가 바로 관세음보살님이라는 불교설화를 소개하며 부모님에 대한 효도가 불자의 으뜸가는 생활덕목이라고 강조했다. ─스님께서는 20여년 전 도봉산 천축사 무문관(無門關)에서 두문불출하며 6년 동안을 오로지 참선에만 몰두하셨습니다. 선실 밖을 벗어나지 않는 수행은 말그대로 고행(苦行)이었을 것이고, 뛰쳐나가고 싶은 생각도 들었을텐데요.


▲죽으려는 마음으로 무문관에 들어갔어요. 그런데 뛰쳐나오기는 어딜 가려고 나오겠어요. 72년에 들어가 78년에 나왔으니 20년도 훨씬 넘는 저편의 일처럼 아련하군요. 석가모니 부처님처럼 부처가 되겠다는 각오로 들어갔으니, 나가도 송장이 되어서 나간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무문관은 계룡산 갑사 위에 있는 대자암에 계시던 정영스님께서 연 선방이었습니다. 정영스님이 5년을 운영하다 봉은사로 가셨지요. 석가모니 부처님이 6년 수행 끝에 대각을 이뤘듯, 한번 들어가면 6년을 수행해 깨달음을 이루자는 뜻이었지요. 무문관이라고 해서 다른 수행처소와 유별나게 다르지 않았지만, 방 밖에도 나가지 않는다는 것이 달랐지요. 밖에서 방문을 걸어잠궈놨어요. 그러니까 앉으나 서나, 숨을 들이쉬나 내쉬는 동안에도 ‘이 뭐꼬’를 놓치지 말자는 일념이 깃든 곳입니다. 사방 일곱 자, 아홉 자 크기의 방 세 칸인 조그만 곳인데, 두 칸은 참선방으로 쓰고, 하나는 화장실이었지요.


무문관 6년 결사는 두 번 했지요. 12년 동안 무문관에 들어온 스님네들이 100명쯤 됐는데, 6년을 마치고 나온 스님은 셋 뿐이 안되요. 첫 번째에는 관응스님하고 제선스님이었어요. 관응스님은 지금 직지사 중암에 계시고, 제선스님은 어디 계신지 다들 모른답니다. 돌아가셨는지도 모르겠어요. 두 번째가 나하고 원공스님인데, 원공스님은 2년 늦게 들어와서 나갈 때는 나랑 같이 나왔어요. 원공스님은 지금도 무문관 꼭대기 방에 계신다는군요. 고행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졸음이 오면 자고, 잠이 오지 않으면 가부좌로 앉아 있고, 걷고 싶으면 걸으면 되고, 끼니 때 되면 밥먹었는데. 밥은 이만한 구멍으로 쟁반에 담아 들어왔어요.


정영스님은 대자암에도 무문관처럼 일곱 자 짜리 참선방 열한 칸을 만들어놨어요. 거기는 여섯 달씩 한다는데, 명년에 들어갈 사람까지 줄을 선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무문관에 이어 해인사 통도사 동화사 선원에서 참선수행을 하셨습니다. 요즘은 재가불자들의 수행 열기도 뜨겁습니다. 스님께 가르침을 구하러 많이 올텐데요. 어떤 말씀을 주시는지요.


▲여러 어른들이 많은 가르침을 주는데 내가 한마디 보태서 뭐하겠어요. 요즘의 선방과 스님들이 어떻네 하며 내 얘기를 들으려고 하는데, 나는 그런 데 개의치 않습니다. 묵숨 걸고 수행하는 스님들 많이 계십니다. 그런 스님들을 위해 공양올리는 불자님도 적지 않고요. 수행하는 스님들을 두고 이렇쿵 저렇쿵 입에 올리는 일이 가당치 않습니다. 자기를 봐야지요. 불교는 나를 밝히자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니 불자라면 반드시 수행을 해야 합니다. 수행 없이, 나를 돌아보고 추스르는 과정도 없이 어찌 살아갈 수 있겠어요. 수행의 궁극은 나를 찾는 것인데, 그 자리는 결코 천상처럼 높은 자리도 아니고, 결국 나라고 부를만한 실체가 따로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기자님이 내 앞에 앉아 나와 얘기를 나눕니다. 이때의 나는 그냥 내가 아니라 기자님과 얘기를 나누는 나라는 이치입니다. 나에게 와서 수행의 길을 물으니 가상합니다만, 어느 절을 가든 수행에 대해 가르쳐주는데 내가 뭐 특별히 줄 게 있겠습니까. 먼 길 마다 않고 산골짜기까지 오셨으니 차 한잔, 밥 한술 나누면서 수행하려고 마음을 냈으니 쉼없이 하라고 거들기는 하지요. 요즘은 절을 찾는 신도들에게 관세음보살을 부르라는 말을 더 많이 합니다. 관세음보살을 부르며 하는 기도는 나도 잘되고, 내 가족, 내가 아는 사람들이 부처님의 가피를 얻어 잘 되자는 것이니까 얕게 볼일이 아닙니다. 나는 조석예불 후와 낮에 한시간 남짓 관세음보살 염불을 합니다. 선이 됐건 염불이건, 부처님 가피를 구하든 순간 순간의 맑은 마음이 소중한 것입니다. ─스님께서는 성철스님의 네 가지 가르침, 밥을 적게 먹어라, 책을 보지 말아라, 돌아다니지 말고 말을 적게 하라는 말씀을 평생 수행의 지침으로 삼으셨다고 밝힌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책은 수행에 참고가 되지 않을까요.


▲책에는 분명 힘들여 이룬 체험이 들어 있고, 지혜가 담겨 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책을 문화의 보고(寶庫)라고 하잖아요. 그러나 책은 남의 것입니다. 나를 대면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세상에는 좋은 가르침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렇다고 세상이 가르침대로 되어 가나요. 내가 없다면 다 소용없는 일이지요. 남의 얘기도 그렇습니다. 절에 나와 법문을 듣고, 교회에 나가 설교도 듣습니다. 돌아서면 그만이예요. 들었다고 할 수 있습니까. 나라는 몸뚱이와 마음의 움직임을 놓치지 말라는 가르침이지요. 그런데 책을 읽다보면 책에서 써놓은 것이 내 생각과 같다고 생각할 때가 있어요. 이때가 나를 놓치는 때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도를 펴놓고 산꼭대기를 손가락으로 가르치고 있다고 해서 산에 오른 것이 아니듯이, 그렇게 생각하면 돼요. ─우문을 드리겠습니다. 깨달음이란 무엇인지요.


▲대답할 말이 없습니다. 다 알고 있는 것입니다. 세 살 먹은 어린애에게 거짓말하라고 가르치는 부모 없습니다. 대학원까지 공부하면서 거짓말하라고 배운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거짓말하지 말라고 해서 그 사람이 거짓말 하지 않겠어요. 그러니 다 쓸데없는 소리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는 새삼스럽게 가르쳐주지 않아도 알고 있는데, 알고 있으면서도 행하지 않을 뿐입니다. 내가 행하지 않으면서 남이 먼저 하지 않음을 탓합니다. 불자는 무엇보다 효순(孝順)해야 합니다. 효도하고 응(應)해야 하는 것이지요. 부모 말씀 잘 듣는 것이 효도입니다. 음식을 잘 장만하고, 의복을 지어준다고 해서 효도하는 것이 아니예요. 어쨌든 속 편하게 하는 것이 부모에 효도하는 것입니다. 모두가 나에게 달린 것입니다. 이치에 어긋나지 않게, 물 흐르듯 거스르지 않게 생각하고 사는 것이 순(順)이고요. 효순을 배우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런데 양로원이 늘어나고, 부모를 죽여 토막내는 세상이 어찌 사람사는 곳입니까. 요새의 천지는 온통 검은 먹입니다. 한 주먹 얼른 움켜쥐어 부자돼서 편히 살려고 하지 땅파겠다는 사람 없어요. 어쨌든 쉽게 벌고, 도둑질할 생각밖에 없어요. 그런데 그 중에 흰 놈이 하나 있어서 “그러면 안된다” 하고 나서면 차음에는 듣지만, 거듭 얘기하면 자기들 하고 같이 검게 만들어버려요. 흰 놈마저 검어지고 마는 것이지요. 몇 년 전 휴거소동이 일어나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지요. 목사가 감옥까지 갔는데, 세상이 온통 검으니 사람들이 휴거에 현혹되지 않을 수 있었겠어요. 이 세상에 종말이 오고 새세상이 열린다는데 솔깃했을 수밖에요. 선진국이라고 하는 나라에서 십대 소년이 권총을 쏘아대는 악랄한 세상입니다. 그래도 좋다고 모두들 선진국으로 가자는 세상인데, 누구에게 잘 하라고 입바른 소리 하겠어요. ─그래도 많은 사람들은 좋은 세상을 만들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최소한 나 때문에 주위 사람들이 피해를 입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들을 갖고 있는데요.


▲늙은이의 푸념으로 들어주세요. 나는 늙어서 이런 욕밖에 못하니 젊은 스님네들과 불자들의 할 일 많아진 것이겠지요. 세상이 험하니 많은 사람들이 희망을 접고 살아요. 원인은 가치관의 혼돈 때문입니다. 한 나라의 가장 큰 지도자가 대통령인데, 대통령해보겠다고 어느 날 아침 여당으로 가는 세상이니, 자기를 흩어지지 않게 붙들어맬 기둥이 흔들리는 모양이지요. 거짓말 잘 하는 사람이 정치 잘 하는 사람이라는 말을 우습게 들어서는 안됩니다. 국민들이 너무 한탄스러워서 뱉아내는 말입니다. 이런 소리 듣고도 ‘나는 아니야’ 라고 생각하지, 뼈저리는 마음으로 사죄하는 사람 못 봤어요. 어린 단종이 작은 아버지에 의해 목숨을 잃었어요. 역사를 배우는 것은 악연을 다시는 짓지 말자는 뜻인데, 악연을 수단으로 삼고 있어요. 역사는 반드시 악연의 결과를 지어줄 것입니다. 삽십년이나 오십년 후 우리 후손들은 오늘 우리의 추한 모습을 보고 또 수단으로 삼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스님께서는 효순하는 것을 불자의 생활덕목이라고 강조하셨는데, 불교는 효도와 거리가 있다는 오해가 적지 않습니다. 불교에서 가르치는 효란 무엇인지요.


▲출가해서 부모를 모시지 않고, 결혼을 하지 않아 대를 잇지 않으니 유교의 입장에서 보면 불효도 보통 불효가 아니겠지요. 중국에서는 이에 대한 논쟁이 많았는데, 출가야말로 부모를 성불시키고 모든 사람들에게 자성을 깨치게 해주니 이보다 더한 효가 어디 있겠어요. <육방예경> <불설부모은난보경> 등 경전에도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가르침이 무척 많습니다. <사십이장경>에 보면, 십억의 아라한에게 공양하기보다는, 백억의 벽지불에게 공양하기보다는 삼존의 가르침을 따라서 그 일세의 양친을 제도함이 좋다고 가르치고 있어요. <관무량수경>에도 정토에 태어나려면 세 가지 복을 닦으라고 하는데, 그 첫째가 부모에 효양하라는 것입니다. 부모님이 바로 부처님이라는 얘기도 전해집니다. 돼지를 잡는 백정이 업장을 씻으려고 보타산에 들어가 한 노스님께 관세음보살이 계신 곳을 물었습니다. 노스님이 “네가 관세음보살을 친견하려거든 빨리 너의 집에 돌아가거라. 관세음보살이 네 집에 계신다. 한 노인이 옷을 뒤집어 입고 신을 거꾸로 신고 너를 마중 나올 것이니, 그 분께 엎드려 절하고 잘 모셔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백정이 이 말을 듣고 집에 도착하니, 어머니가 급히 문을 열어주려고 나오는데 옷은 뒤집어 입었고, 허겁지겁 신발도 거꾸로 신은 채 달려나왔다. 이를 본 아들이 “당신이 관세음보살입니다”하고 엎드려 절을 했다는 얘기입니다. 모든 사람을 성불로 이르게 하는 일이 큰 효라면, 부모님을 부처님으로 받드는 일은 사람으로서 살아야 할 도리입니다. 도리에서 어긋나서야 어찌 부처님 제자이겠습니까. 우리가 불교를 하는 것은 부처님을 좇아서 살자는 것이지요. <불승도리천위모설법경>에 보면, 부처님이 성도 후 도솔천에 올라가 어머니를 위해 3개월 동안 설법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우리야 부처님처럼 깨닫지는 못했지만, 부처님을 따라 살려는 불제자이니 부처님이 하신 것을 그대로 모양내면 되는 것입니다. 가르침이 없어서 우리가 험하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수행을 하고 기도를 하는 것은 가르침을 받들어 행하자는 얘기이기도 합니다. 세상이 다 아는 얘기 하나 보태지요. 조과선사와 유명한 당나라 시인 백낙천의 대화입니다. 백낙천이 물었습니다. “어떻게 수행해야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까?” 조과스님이 대답했습니다. “나쁜 짓은 하지 말고, 힘써 선행을 하면 됩니다.” “그런 것 쯤이야 세 살 먹은 아이도 하는 말 아닙니까?” “세 살 먹은 아이도 쉽게 알아 들을 수 있는 말이지만, 백 살 먹은 노인도 행하기는 어렵지요.”지하철역에도 액자에 이런 얘기를 담아 걸어놨더군요. 가르침을 찾아다니는 수고는 그만 하고 아침에 집을 나서며 품었던 한 생각 오늘 실천하면 됐지, 어디에 새로운 세상천지 있다고 누가 그러던가요.


대담=정성운 차장

이송영
2019-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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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응스님

“안개가 스쳐가듯 고요한 적멸의 세계에 들어가듯 그렇게 열반에 드셨습니다. 그 용안이 너무나 평안하고 자연스러웠지요.”


관응 스님의 맏손상좌인 도진 스님(중암 주지)은 관응 스님의 입적 모습을 이렇게 표현했다.


“고요히 숨을 거두는 정도가 눈에 띄지 않고 가슴에 와 닿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죽음과 적멸에 이르는 모습이 이렇게 다른 것이구나 생각했습니다.”


관응 스님의 입적 모습을 통해 추상적으로만 생각하던 “적멸(寂滅)”을 느꼈다는 스님은 임종시 관응 스님과 같은 생애를 마칠 수 있어야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도진 스님은 18세 용주사로 출가할 때부터 약 38년 간 스님을 옆에서 모셨으며, 1984년 10명의 제자에게 3년간 전강을 내린 후 조용히 살겠다는 스님의 서원에 따라 중암을 복원하고 주지로 부임하여 20년간 스님과 함께 지냈다.


도진 스님은 관응 스님의 행장을 하나하나 기억하고 있었다.

1965년 도봉산 천축사 무문관 6년 결사, 조계종 정화 직후 1959년 조계사 초대주지 취임, 또 1975년 청암사 수도암에서 세수 66세의 노구로 젊은 납자와 함께 안거 정진했던 순간까지.


1965년 도봉산 천축사 무문관 6년 결사에는 처음 5명이 들어갔으나 끝까지 회향을 마친 스님은 두 분뿐이다. 그중의 한분이 관응 스님. 무문관 6년 결사를 회향하며 스님께서 하신 말씀은 “나는 공부한 것이 없다”이다. 도진 스님은 지금도 그 뜻이 무엇인지 예측을 못하겠다고 말한다.


또 1959년 종단 정화 직후를 회상하며 “관응 스님은 최초의 조계사 주지이며 당시 최고의 포교사였고 또 정화에도 관심이 높았던 분”이라고 말한다.


당시 종정이었던 동산 스님은 포교를 맡아 할 인물이 관응 스님 뿐이라는 판단에 직지사 강주로 있던 관응 스님을 조계사 주지와 중앙포교사로 동시 임명했다. 관응 스님은 당시 학인스님을 그냥 둘 수 없어 80명의 학인스님을 모두 데리고 조계사로 갔다. 그러나 도심지라 스님들이 공부하기에 적합지 않았고, 다시 용주사 정화에 들어갔다. 용주사 정화에는 어떤 물리적인 방법이 동원되지 않은 평화적인 정화로 유명하다.


세수 66세 때는 청암사 수도암에서 고성 스님, 석주 스님과 몸소 찬물에 당신 옷을 빨아가며 수행 정진했다. 젊은 납자와 탁마 정진한 안거는 드문 일로서 당시 젊은 납자에게 공부할 신심을 불러일으킨 충분한 동기가 됐다. 당시 수도암 암주가 장의위원회 증명으로 추대된 지금의 종정 법전 스님이다.


도진 스님은 1984년 관응 스님이 75세의 노구를 이끌고 원산, 범하(통도사 박물관장), 연관(문화재 위원) 스님 등 10명의 제자에게 3년간 부처님의 경전을 가르쳐, 전강을 내렸던 일은 그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고 회고했다.


도진 스님이 지켜봤던 관응 스님은 최고의 대강백이며 초교사였고 또 정화에 앞장선 분이셨다. 부처님의 경전 뿐 아니라 유학, 신학문, 철학에 능통했으며, 유식학의 체계를 세운 유식학의 거봉이다. 수행에 있어서는 철저하게 계를 지키는 삶을 살면서도 김수환 추기경이 포도주를 권할 때 기꺼이 받아 마시는 포용력까지 갖추었다.


도진 스님은 관응 스님을 한마디로 인자한 분이라고 표현했다. 그렇다고 말씀이 많았던 것도 아니지만, 표정으로 모든 허물을 덮으며 교훈이 되게 했다는 것이다.


또 직업의 귀천이나 상하 구분 없이 누구나 만나고 무엇이든 받으셨다고 한다. 심지어 개구쟁이가 장난감을 가져오면 장난감을 받아 방 한 켠에 고이 진열까지 했었단다.


관응 스님은 열반게를 남기지 않았다. 도진 스님이 어른 스님께 열반송을 부탁드리자 유언처럼 하신 말씀이 있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그림자와 같다. 그림자는 그림자를 낳지 않는다.” 지금은 도진 스님에게 화두가 되었다고.


“당신이 활약하고 수행하고 많은 세월을 사셨지만 이 사바세계에 나타내는 자체도 싫어하셨습니다. 장례도 화려하게 하지마라. 평범하게 수행자의 모습도 나타내지 않도록 하라고 하셨습니다.” 지금의 장례절차도 평소 관응 스님의 말씀에 따라 될 수 있는 한 소박하게 수행자의 모습답게 치루려고 한다고 스님은 말했다.


“평소 하신 말씀이 임종게지 따로 생각할게 있겠냐”고 말하는 도진 스님은 “스님께서 항상 외경에 붙들리지 말고 열심히 수행하라는 당부와 수행자는 ‘정지견(正智見)’과 ‘겸손’을 가져야 한다고 늘 말씀하셨다”며 스님의 가르침을 되새겼다. 또 ‘선(禪)·교(敎)에 치우치지 말라’는 가르침과 함께 늘 앉아서 수행 정진하는 모습을 보이셨다고 한다.


관응 스님과 가장 가까웠던 도반은 고성 스님과 석주 스님이다. 석주 스님은 호상을 맡아주시기로 허락하셨다.


관응 스님은 평소 검소하고 간결하게 사셨다. 유품으로는 가사장삼, 발우대, 주장자(주杖子), 석주 스님이 주신 청여장이 전부이다.


관응 스님 행장


1910년 경북 상주군 외서면 출생.

1929년 상주 남장사에서 혜봉 스님을 계사로, 탄옹 스님을 은사로 득도.

1934년 유점사 전문 강원 대교과 졸업.

1936년 서울 선학원에서 보살계 및 비구계 수지.

1938년 중앙불교전문학교 졸업, 문경 김용사 강사 취임, 해인사 해외유학생으로 선발.

1942년 일본 경도 용곡대(龍谷大) 졸업.

1943년 오대산 월정사서 안거.

1952년 해인사 백련암, 고성 옥천사 등지서 안거 수행.

1956년 황악산 직지사 조실 추대.

1959년 조계사 주지 및 중앙포교사 취임.

1961년 동국학원 이사

1963년 용주사 주지.

1965년 대구 능인학원 이사. 도봉산 천축사 무문관 6년 결사.

1981년 직지사 주지.

1985년 조계종 원로회의 부의장.

1989년 학교법인 보문학원 이사장. 청소년교화연합회 총재.

2004년 현재 조계종 원로회의 명예원로. 황악산 직지사 조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