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 지 사 항

공 지 사 항 8
이송영
2019-10-14
조회 5

무문관(無門關) 下 - 선객들 그들은 누구인가

승인 2010.06.19 09:05


“나라 위기 극복하고, 새 역사 창조할 선도자”


제1차 무문관 정진 회향 소식을 다룬 당시 불교신문 보도. 행사사진 설명을 통해 관응 현구 석영스님만 참석하고 지효, 경산스님은 참석하지 못했다고 전하면서 지효 관응 경산 석영 현구스님 등 5명의 사진을 별도로 실었다.



드디어 1972년 4월28일, 부처님오신날을 한 달여 앞 둔 이날 도봉산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6년 전 8평의 좁은 방에 들어가 면벽 정진하던 스님들이 나오는 날이었다. 천축사 무문관 폐관정진(閉關精進) 수행자를 맞이하기 위해 종단 중진스님들과 신도 등 1000여 명이 좁은 천축사 경내와 주변 산을 가득 메웠다.


총무원 교무국장 정달스님이 사회를 보고 교무부장 월주스님이 경과보고를, 총무부장 광덕스님이 축사를 했다. 중앙종회의장 벽안스님, 부의장 녹원스님이 축사를 했다. 전국신도회 박완일 부회장, 천축사 신도회장 장길상화 보살도 축사를 했다. 중앙일간지가 앞 다퉈 보도하고 전 종단이 나서 축하하는 자리였다. 멀리 미국에 가있던 덕산 이한상 거사도 축전을 보내 축하했다. 광덕스님은 이 자리에서 “무량광명을 놓는 도인의 출현과 이 혼탁한 세계의 불멸등을 세우기 위한 불사가 원만히 성취된 것을 감사하며 장차 이 나라의 위기를 극복하고 새 역사를 창조하는 선도자가 되어주기를 기대한다”고 인사했다.



무량광명 놓는 도인 출현


이 혼탁한 세계에


불멸등 건립 불사


원만히 성취된 것 감사


총무부장 광덕스님 ‘축사’


이날 회향한 스님은 모두 5명이었다. 불교신문은 5명의 명단을 관응, 석영(夕影), 현구(玄球), 경산, 지효스님으로 적고 있다. 불교신문 보도에 따라 종단의 역사서와 모든 자료에 5명의 이름이 나온다. 그러나 입방자 명단과 다르다. 첫 입방자는 제선, 홍근, 혜원스님 이었다. 2년 뒤 경산스님 지효스님이 입방했다. 확인되는 인물은 대강백 관응스님, 총무원장을 역임한 경산스님, 그리고 정화의 주역 지효스님이다. 경산스님은 전술(前述)한 것처럼 총무원장을 내려놓고 무문관에 입방했다.


지효스님은 원래 불국사에 있다가 은사 동산스님이 입적하면서 범어사로 가서 내원암을 개간하며 선농일치의 삶을 살았다. 이 때 세속에 함께 있었던 ‘절친’ 현구스님이 줄곧 함께 했다. 오랫동안 천축사에 머물며 무문관을 개설했던 정영스님은 당시 종단 총무부장을 맡고 있었다. 스님은 더 큰 뜻을 펼치고 싶다며 봉은사로 옮겨가고 지효스님, 현구스님 등 범어사 스님들이 천축사로 간다. 지효스님과 현구스님은 이렇게 해서 6년 정진 중간에 입방해 4년을 마친 것이다.


이후 지효스님은 1차 결사에 이어 1972년 2차 결사에도 참여해 가장 많은 기간을 무문관 정진했다. 지효스님이 천축사에 계속 머물러 제자들 중에는 천축사에서 출가한 스님들이 많다. 구도소설 <만다라>의 저자 김성동 씨도 천축사에서 출가해 만다라의 원본인 ‘목탁새’가 문제가 돼 강제 환속 조치 당했었다. 최근 무문관을 다시 개설하겠다는 원력을 밝힌 현 천축사 주지 유방스님도 1970년대 말 천축사로 출가했다.


현구스님은 속명이 문문종이다. 원래 동산스님 상좌가 아니었는데 건당을 했다. 다음은 흥교스님의 증언이다. “정화에 적극 참여해 줄곧 지효스님과 함께 했다. 창원 성주사, 사자산 법흥사 범어사 등지에서 공부했다. 범어사 내원암에 살 때는 선농일치를 주창하며 논을 개간했다. 지효스님과 함께 봉은사에 있다가 천축사로 갔다. 평생 수좌로 선원을 다니다 입적하신지 몇 년 되지 않은 것으로 안다.”


1차 제선 관응, 2차 구암 원공스님 ‘6년 폐관 정진’


지효스님 1~2차 ‘최장기간 정진’ 건강악화로 중단


무문관 개설 첫 주창 제선스님, 정진 마치고 사라져


보살로 불리던 혜원스님, 사형 제선스님 ‘6년간 외호’


석영스님은 제선스님을 말한다. 석영스님, 즉 제선스님은 6년을 정진했다. 석영스님은 무문관 개원 6개월 전부터 정진을 시작해 이미 1971년 6월 만료했다. 그래서 회향식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은사인 윤포산 스님으로부터 ‘제주도에서 선 공부 하러 왔다’고 해서 ‘제선’이라는 법명을 받았다는 제선스님은 무문관 6년 고행을 마치고 홀연히 떠나 그 뒤 행적을 아는 사람이 없는 전설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다. 유일하게 남아있는 증언은 일타스님이 생전에 들려준 일화다. 제선스님은 제주도 출신으로 일본 유학을 했으며 독립운동에도 가담했다고 한다. 아들을 잃고 금강산에서 방황하던 중 스님을 만나 불교에 입문, 해인사 백련암으로 출가했다. 천축사 무문관 입방 당시 나이는 40대 후반이었다. 6년 정진 회향일을 며칠 앞두고 한 재가자가 TV 인터뷰를 추진하자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고 증언했다. 이것이 지금껏 일타스님을 통해 알려진 제선스님 행적 전부다. 일타스님은 형과 외삼촌들이 제선스님 사제여서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제선스님은 6년간 관촉사 주지를 역임했지만 실질적 운영은 사제인 혜원스님에게 맡기고 선방으로만 다녔다. 그러다 사제인 정영스님이 천축사 주지에다 총무원 총무부장을 맡자 무문관 개설을 권유한다.


보살로 불릴 정도로 자비스럽던 혜원스님은 제선스님이 무문관에 들어가자 외호(外護)를 자청했다. 입방 당시 불교신문은 혜원스님에 대해 이렇게 보도했다. “혜원스님은 6년 정진을 하며 공양주를 자처했다. 스님은 ‘나는 입실 자격이 없고 하여 선실에 견성할 스님의 뒷바라지가 나의 소원이다’며 공양주를 살았다.” 6년을 외호한 혜원스님은 제선스님이 정진을 마치고 떠날 때 시봉하던 제자를 부산까지 따라 보내며 배웅토록 했다. 그리고 대전으로 내려가 토굴을 짓고 열반 때까지 정진했다. 제선스님은 부산에서 한려수도행 배를 탄 뒤 행적이 끊겼다.


홍근스님은 종정을 역임한 서암스님이다. ‘홍근’은 서암스님의 법명이며 속명이다. 당시 불교신문에 스님의 사진이 나오는데 스님의 얼굴이 뚜렷하다. 스님의 행장에는 1966년 50세에 무문관에서 안거를 들고 1967년 김룡사 금선대에서 안거를 했다고 적혀 있다. 1년가량 있다가 천축사를 떠났다는 것이다.


무문관 1차 6년 정진과정을 모두 마친 선객은 제선스님과 관응스님이다. 그리고 경산스님과 지효스님, 현구스님이 4년을 마쳤다. 혜원스님은 6년을 외호했다.


2차 정진은 1972년 동안거 결제일이던 11월26일부터 시작됐다. 당시 천축사 주지는 1차 무문관 폐관 정진했던 현구스님이었다. 무문관 출신들은 동문회를 결성해 입방자를 전형으로 선발했다. 그렇게 해서 2차 입방자로 선발된 사람은 모두 5명이었다. 당시 불교신문에 보도된 5명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성운(聖雲)스님, 무불(無佛)스님, 법경(法鏡)스님, 일원(一圓)스님, 상현스님. 이들 중 2명이 1978년 11월10일 6년 정진을 마치고 회향했다. 불교신문은 당시 보도를 통해 2차 정진에서 6년을 모두 채운 두 스님이 무불스님과 원공스님이라며 두 스님의 소감을 이렇게 적고 있다. “석가세존도 인도설산에서 6년간 고행, 세존과 비슷한 여건이나마 만들어 공부하고 싶어 들어갔다. 자고 나면 오늘이 시작이구나 하고 여기면서 세월을 생각하지 않고 밥 먹고 잠자는 시간 외에는 면벽참선을 했다.”


‘성운’은 지효스님의 법호(法號)다. 지효스님이 천축사로 옮겨와 1차 4년 정진에 동참한데 이어 다시 2차 정진에도 참가한 것이다. 지효스님이 2차 6년 정진을 마치지 못한 것은 정화 때 할복한 후유증 때문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상좌인 김성동 소설가는 이렇게 밝힌 바 있다. “1950년대 초의 정화불사(淨化佛事) 당시 할복하시었던 자리가 덧나서 무문관(無門關) 6년 결사 중에 잠깐 치료차 나오신 것이라고 하였다.” 즉 몸이 아파 정진을 계속 이어갈 수 없었던 것이다. 지효스님은 범어사 평생수도원에서 정진하다 열반에 들었다. 치료차 나오기는 했지만 지효스님은 1, 2차 합쳐 가장 긴 시간을 무문관 정진했으며 천축사를 이끌었다. 지금도 권속들이 천축사를 지키고 있으며 손상좌인 현 주지 유방스님은 무문관 재개원 원력을 세웠다.


무불스님은 경기도 하남 광덕사에 주석했던 구암스님을 말한다. 무불스님은 생전에 동화사 금당에서 결제 중 천축사 무문관 6년 두문불출 정진자 모집 안내장을 보고 입방을 했다고 밝혔다. 스님은 당시 하안거가 다섯 번이 안돼 특별정진에 들어갈 수 없었지만 사형인 구산스님의 지원과 여러 스님의 후원에 힘입어 참여하게 돼 1차 1년 정진자에 들어갔다. 뛰어난 정진력으로 조실 스님의 칭찬을 받은 주인공이다. 이어 두 번이나 더 1년 정진에 들어간 뒤 1972년 6년 폐관정진에 동참해 회향한 것이다. 무불스님은 “그 긴 시간을 긴 줄도 모르고 정진 했는데 거기서 내가 얻은 가장 큰 수확이라면 수행자는 대중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고 그래서 그 후로도 해인사 통도사 등 대중처소에서만 수행을 했다”고 밝혔다.


상현스님은 제선스님의 상좌로 알려져 있다. 법경스님은 해인사 출신이다. 지효스님 상좌로 알려진 일원스님이 원공스님으로 보인다. 원공스님은 무문관 회향 후 이듬해 3월부터 걷기 수행에 들어갔다. 스님은 6년간 꼼짝 않고 앉아 무문관 수행을 했으니 이젠 걸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한 것이 30년 넘게 계속됐다고 말했다. 스님의 걷기 수행은 지금도 계속 진행 중이다.

이송영
2019-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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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문관(無門關)은 본래 남송(南宋)시대 무문혜개(無門慧開) 스님이 지은 책 이름이다. 깨달음의 경지인 무(無)를 표현하고, 무자(無字) 화두를 탐구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지금은 수좌들이 바깥 출입을 금하고 수행에만 몰두하는 정진을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단어만 살피면 ‘문이 없는(無門)’ 수행이지만 화두 참구를 통해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 근본적인 뜻이다. 치열한 정진으로 ‘무문’을 지나 ‘개문(開門)’의 경지에 도달해 궁극적인 깨달음을 성취하려는 원력이 숨어있다.


사실 문(門)의 ‘위치’를 어디로 하는냐에 따라 무문관의 범위와 종류는 달라질 수 있다. 동학사와 천장암에서 문을 폐(閉)하고 정진하여 깨달음을 성취한 경허스님, 오대산을 떠나지 않고 수십년 정진했던 한암스님, 10년간 팔공산을 나서지 않은 성철스님의 동구불출(洞口不出)도 무문관 수행이나 마찬가지다.


외부와 단절, 수행에만 전념


근래엔 65년 천축사서 개설


최근에는 대중과 격리된 공간에서 각자 방문을 닫아걸고 화두 참구에 전념하는 경우를 무문관 수행이라고 한다. 무문관은 밖에서 자물쇠를 채우고, 공양도 외호대중이 공양구(供養口)라는 작은 문을 통해 전달 받는다. 이때도 대화는 금지되며 불가피할 경우 필담(筆談)으로 소통이 이뤄진다. 일체 말을 않는 묵언(言)이 무문관 정진의 기본인 까닭이다. 이 같은 수행은 치열함에서 비롯됐다. ‘나’를 제외한 외부와의 소통을 모두 단절하고, 오로지 화두 참구에 집중하는 방편이다.


지금과 같은 우리나라 무문관은 1965년 12월27일 낙성된 도봉산 천축사가 그 시초이다. 천축사 무문관은 “부처님처럼 6년간 정진할 수 있는 올바른 수도원을 세우고, 본분 납자를 배출해야 한다”는 원력에서 비롯됐다.


<사진> 방문을 닫아 걸고 수행에만 전념하는 백담사 무금선원 무문관. 불교신문 자료사진


당시 3년 결사의 원력을 세운 제선(濟禪).홍근(鴻根,서암).혜원(慧元).정영.관응(觀應)스님 등 16명이 방부를 들였다. 이어 1968년 2월에는 당시 총무원장 경산(京山)스님이 무문관 정진에 동참했다. 1972년 4월28일 관응.석영(夕影).현구(玄球)스님이 6년 정진을, 지효(智曉)스님과 경산(京山)스님이 4년 정진을 회향했다. 같은 해 11월에는 무불(無佛)스님과 원공(圓空)스님 등 5명의 스님이 제2차 방부를 들였으며, 무불.원공스님은 1978년 11월에 6년 정진을 마쳤다.


이밖에도 무문관이 개설된 도량으로는 제주 남국선원, 인제 백담사 무금선원, 경주 무일선원 등이 있다.


서옹스님-1대조실 전강스님-2대조실/ 정영스님 천축사무문관 창설(제선스님 사제)


1차결사 1965년12월27일


1.제선(濟禪)/석영. 1차 6년 결사-은사(윤포산스님),사제(일타스님)

2.홍근(鴻根,서암). 1년

3.혜원(慧元) .1차 6년 결사 (제선스님 사제)

현구(玄球), 4년

4.정영.

5.관응(觀應),

6.경산(京山),

7.관응.

8.석영(夕影).


2차 결사 1972년 11월26일(5명)

1.성운/지효(智曉), 4년

2.법경

3.일원/원공(圓空) 6년결사 (지효스님 상좌)

4.상현 (제선스님 상좌)

5.무불(無佛)구암 6년결사





이송영
2019-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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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축사 무문관의 유례


부처님 설산 고행’ 본받아 ‘6년 정진’ 시작


1965년 12월27일 천축사 첫 개설…‘종단 안팎 신선한 충격’


제선 홍근 혜원 스님 3명, ‘100일 정진 시험’ 거쳐 3명 추가




통합종단 출범 후 3대 사업이 마련되고 승려교육 청정 수행가풍 조성을 위한 움직임이 다양하게 일었다. 이런 가운데 도봉산 천축사에 부처님의 6년 설산 고행을 따라하는 6년 고행 정진하는 선원이 생겨 종단 안팎으로 신선한 충격을 던졌다. 무문관(無門關)은 6년간 일체 외부 출입을 삼가고 오직 정진만 하는 고행의 최고 단계였다. 당시 주지였던 정화의 주역 정영스님이 원력을 세워 수행만 전문으로 할 수 있는 현대식 선원을 세웠다. 그리고 희망자 중에서 큰 원력을 갖고 그동안 치열하게 정진해온 스님을 선발했다. 1965년 12월27일 무문관 결사가 시작됐다.


6년동안 독방에서 자율로 정진하는 6년 폐관(閉關) 정진자 첫 수행자는 3명이었다. 당시 관촉사 주지 제선(濟禪)스님, 김용사 홍근(鴻根)스님, 관촉사 혜원(慧元)스님 등 3명이었다. 독방은 철저히 외부와 폐쇄됐다. 안팎을 2중으로 잠그고 욕실과 화장실을 두어 안에서 모든 일을 보도록 했다. 외부와는 일체 차단했으며 음식은 아래에서 위로 향해 난 통로를 통해 배식했다.


세 명이 독방에서 자율로 정진하는 것과 별개로 대중방에는 19명의 수좌가 100일 정진을 시작했다. 이들 중 정진을 잘하는 3명을 선발하기로 했다. 일종의 시험기간이었던 셈이다. 100일간 지켜본 뒤 자격이 되면 6년 정진에 동참토록 한다는 것이다. 19명 명단은 다음과 같다. 적광(해인사), 지공(천축사), 경심(범어사), 관응(용주사), 덕산(정각사), 인해(천축사), 정만(동화사), 장춘(해인사), 법명(해인사), 자안(장경사), 도정(화엄사), 관묵(갑사), 혜성(갑사), 월복(동화사), 천장(백양사), 정각(천축사), 법중(천축사), 도영(극락사). 도천(낙산사)스님.

‘1년 결사’ 동참자 20여명도 ‘하루 18시간’ 치열한 구도 정진

정화 주역 정영스님 원력…서옹·전강스님 조실 납자들 지도


대중선방 역시 엄격했다. 당시 조실은 서옹스님이 맡아 납자들을 지도했다. 잠자고 밥 먹는 시간을 빼고는 모두 정진이었다. 하루 일과를 보면 2시 기상, 아침7시까지 정진, 8시까지 1시간 공양, 11시30분까지 정진, 한 시간 공양 후 12시30분부터 5시까지 정진. 다시 1시간 공양 후 오후6시부터 11시 잠잘 때까지 모두 18시간을 정진했다.


100일 뒤 세 명이 선발됐다. 당시 용주사 주지 관응스님과 도정스님, 자안스님이었다.


중국에도 없었고 한국에서도 일찍이 그 유래를 찾기 힘든 6년 고행정진은 이렇게 시작됐다. 그 공은 전적으로 정영스님 몫이었다. 정영스님은 정화에서 큰 역할을 하고 총무원 총무부장을 역임하며 종단의 기틀을 세운 주역이다. 포산스님 상좌로 첫 6년 입방자 제선스님은 사형이 된다. 1955년부터 천축사 주지를 맡은 스님은 1964년 무문관 건립을 시작한다. 스님은 무문관 건립을 위해 직접 자재를 나르는 한편 화주를 하고 모자라는 돈은 빚을 내었다. 1965년 당시 불교신문은 정영스님이 무문관을 건립하기 위해 “언 손에 피가 나도록 돌을 깨고 화주 책을 끼고 인연 있는 사람 찾아 가파른 산길 오르내렸다”고 보도했다.


무문관을 건립한 이유에 대해 스님은 생전에 이렇게 증언했다. “중국에 사관이라는 데가 있어서 한번 들어가면 거기서 견성을 해서 나오든지 죽든지 자기관을 만들어 놓고 정진하는 곳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나라는 그런 곳이 없는데 우리나라에도 그런 식으로 공부하는 사람이 많아요. 효봉스님도 금강산 신계사 미륵암에다 못을 쳐놓고 출입을 안하고 3년 동안 수행하셨고 경허스님도 그런 사람 중에 하나였고 영원조사도 상좌를 제도하려고 금강산 영원암에 가둬놓고 밥을 갖다 주고 그리했다는 말이 있거든요. 그런 것으로 보아서 스님들이 그런 곳이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고 희망을 더러 해요. 누가 그런 곳을 만들었으면 좋겠는데 하는 사람이 없어서 할 수 있다면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런 것을 구상하게 된 것이죠. 그래서 중국의 사관 같이는 할 수 없고 우리는 부처님의 6년 고행과 같이 6년을 수행하자했죠”(‘선우도량 한국불교근현대사연구회’중에서)


무문관이 처음 문을 연 것은 1965년 12월27일이었지만 완공된 것은 1966년 4월6일이었다. 3층 현대식 건물이었다. 현대식 선원은 최초였다. 99평 크기에 독방 5개, 30명이 함께 정진할 수 있는 대중방 그리고 주방을 갖추었다. 공사비는 모두 370만원이 들어갔다.


낙성식에는 총무원장 경산스님, 종회의장 청담스님, 감찰원장 월하스님, 불교신문 사장 덕산 이한상 거사 등 1000여명의 신도가 동참했다. 이 자리에서 6년 정진에 포함된 관응스님이 정진자 대표로 나서 인사했다. 관응스님은 “위로는 제불보살의 가호가 있고, 밖으로 사부대중의 외호가 있으며 아래로 팔부신장의 두호함이 있으니 아무런 장애도 없을 것이며 기필코 대도를 성취하고야 말겠다”고 인사했다.


건물을 짓는 것으로 모든 문제가 마무리되는 것은 아니었다. 연중 30명에 이르는 선방 대중을 뒷바라지 하는 것은 여간 벅찬 일이 아니었다. 한 사람의 생활비가 당시 4000원 모두 10만원가량 필요했다. 이중 5만원은 천축사 경비로 충당했지만 나머지는 후원회를 결성해 조달했다. 정영스님은 700명의 운영후원회를 결성해 월 50원의 회비를 받았다. 당시 불교신문 사장이던 덕산 이한상 거사는 매달 쌀 1가마와 20만원을 지원했다. 천축사는 당시 월 50%에 이르는 고리채로 허덕이는 와중에도 선원을 적극 후원하고 운영했다.


첫 입방자 3명에다 100일 정진기간에서 통과한 3명을 합쳐 6명이 6년 고행이 계속되던 1966년 하안거 결제일에 또 다시 1년 결사가 시작돼 1967년 4월23일 회향했다. 1년 결사는 모두 10명이 수료했다. 조실은 서옹스님이었다. 이들은 서옹스님의 지도 아래 가행정진했다. 20세 이상의 비구로 전국 본 말사 추천서를 받아 입방한 수좌였다. 이들은 안거 동안 7일 용맹정진 4차례, 2개월 마다 가행정진 1차례 등 치열하게 수행했다. 용맹정진은 7일 동안 잠을 자지 않고 눕지 않는 그야말로 목숨을 건 수행이었다. 당시 1차 1년 정진 수료자 명단은 다음과 같다. 법정(法定, 27세 갑사), 우성(宇性, 24세, 천축사), 무불(無不, 49, 동화사) 천봉(天峰 22, 천축사) 동철(東哲 25, 선암사), 유현(幽玄 23, 범어사) 법상(法象, 28 법주사), 정호(淨護 49, 해인사), 지원(智元 40, 범어사)스님.


몇 스님을 빼고 모두 20대다. 당시 스님들이 얼마나 정진에 목말라 했으며 수행 열기가 어떠했는지를 보여준다. 이중 법정스님과 우성스님은 수도생으로 모범을 보여 조실과 대중으로부터 칭송을 받았다고 한다. 1차 수료생 무불 스님은 1972년 1차 6년 폐관정진에 동참해 1978년 회향했다.


1차 회향일날 2차 1년 정진이 시작됐다. 20세 이상 비구 중 3년 이상 강원 선원에서 수행한 수좌 23명이 2차 1년 정진에 들어갔다. 1년 뒤 11명이 회향했다. 이 가운데 무불 우성 유현 천봉 법상 스님은 1차 1년 정진 동참자였다. 이들 외에 종호 호호 학혜 창도 광성 동광 스님이 1년을 마치고 회향했다.


1968년 4월 12일 서옹스님 이후 공백으로 있던 2대 조실에 전강스님이 취임했다. 당시 스님은 이미 71세의 고령이었는데 무문관에서 수행하던 관응스님 경산스님 지효스님이 대중들의 의견이라며 조실을 간청해 이뤄졌다.


1967년 7월 해인사에서 열린 임시중앙종회에서 당시 종정 청담스님과 불화를 빚어 총무원장에서 전격사퇴한 경산스님은 1968년 2월27일 4년 간을 기약하고 무문관에 입방했다. 무문관에 입방한 경산스님을 인터뷰한 불교신문은 이렇게 보도했다. “경산스님은 그동안 종단 행정직에 있었던 것부터가 불문에 들어온 큰 뜻이 아니었음을 후회하고 즉시 서울을 떠나려고 했으나 총무원과 동대 재직 중에 벌인 잔무가 남아있어 부득이 지금까지 있게 되었다며 이제 수도인의 본분으로 말썽 많던 일체 종단일을 체념하고 일단 무문관에 들어간 이상 견성하기 전에는 세상에 나오지 않겠다고 말했다.”


정화 당시 혈서로 기개를 보여주었던 선객 지효스님도 동참했다. 무문관을 만든 정영스님은 천축사를 떠나 1993년 대자암에 무문관을 개설해 입적 때 까지 그곳에 머물며 수행했다.

이송영
2019-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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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성제 부처님 초전법륜의 핵심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정각을 이루신 뒤 도반이었던 다섯 명의 고행자들에게 자신이 깨달았던 내용을 고(((()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초전법륜(初轉法輪)을 해주셨다이 고 집 멸 도를 4(四諦)라고 하는데성인에 의해 성인이 되는 방법을 제시한네가지의 성스러운 진리라는 의미에서 4성제(四聖諦)라고도 한다.


상응부경전]에 사성제가 곧 진여(眞如)요 불허망(不虛妄)이요 불변이(不變異)이다.”라고 표현되어 있다사성제는 발자국 중에서는 모든 동물의 발자국을 다 포섭할 수 있는 코끼리 발자국에하늘의 뭇 별들 중에서는 가장 밝은 해와 달에 비유된다불교의 온갖 교설이 사성제에 다 포함된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비유다한마디로 사성제는 불교의 궁극적 목표를 향해 정확한 방향을 가리키는 나침판이다그러므로 사성제를 제외해 놓고 불교를 논할 수 없으며붓다가 설한 교법 가운데 가장 근간이 되는 것이 바로 사성제다따라서 사성제를 모르고는 불교를 제대로 안다고 말 할 수 없으며사성제를 제대로 알면 불교를 정확하게 요해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성제 법문은 그 설상(說相)의 형식으로 보면 다양한 교문(敎門)을 극히 간단하게 총섭한 교조(敎條)에 해당한다하지만 이것을 진리의 형식으로 보면 사실세계와 이상세계 전체에 걸친 양 법칙에 대한 인식이라 할 수 있다붓다가 사성제를 교법의 근간으로 삼았던 까닭은 이 사성제에 의해 현실과 이상이라는 두 세계에 걸쳐 항상(恒常)하는 법칙이 밝혀지기 때문이다즉 고 · 집의 계열은 윤회계(輪廻界)의 인과를 명확히 했던 것이고멸 · 도의 계열은 해탈계(解脫界)의 인과에 관한 것으로서이 두 세계의 결합은 드디어 존재와 당위 전체를 모두 포섭하는 범주가 되는 것이다


사성제를 설하는 논법(論法)은 훌륭한 의사의 치료법에 비유된다의사가 질병을 치료하는 경우에먼저 그 질병이 무엇인가라는 병상(病狀)에 대한 올바른 진단이 필요하고다음으로는 그 질병이 어떠한 원인에서 생겨났는가를 알아 병인(病因)을 멈추게 해야 한다마찬가지로 정신적 질병인 인간들의 고뇌를 치료하는 불교에서도먼저 고()의 진상(眞相)인 고성제(苦聖諦)을 설명하고고의 원인을 규명한 집성제(集聖諦)고가 소멸된 상태인 멸성제(滅聖諦)고의 소멸에 이르는 방법인 도성제(道聖諦)을 제시한 것이다.

 


고성제는 태어나는 괴로움(生苦), 늙는 괴로움(老苦), 병드는 괴로움(病苦), 죽는 괴로움(死苦등 생노병사의 네 가지 괴로움에다가 미워하는 이를 만나는 괴로움(怨憎會苦), 사랑하는 이와 헤어지는 괴로움(愛別離苦), 구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괴로움(求不得苦), 인간의 존재인 다섯 가지 구성 요소의 괴로움(五陰盛苦)이 더해 여덟 가지 괴로움(八苦)으로 정리할 수 있다그러나 이 여덟 가지는 실상 모든 괴로움을 내포한 것이어서 일체개고(一切皆苦)가 된다.


집성제는 고의 근원이 집착(慾心)에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성스러운 가르침이다인간들의 번뇌 망상은 모두 욕심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며 모든 고통도 과욕 때문에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그래서 부처님은 인간의 내면에 깊이 자리잡고 있는 인간의 욕심을 집()이라 말씀하신 것이다좀 더 부연하면 고는 탐(탐욕), (혐오), (미망)라든가 쾌락에 대한 집착인 욕애(欲愛), 물질의 소유에 대한 집착과 갈등인 유애(有愛), 무소유와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집착인 비유애(非有愛)등으로 인해서 생기(生起)하는 것이다.


멸성제는 집으로 인해서 생긴 고를 소멸시킨 경지에 대한 가르침이다즉 괴로움을 증폭시키는 원인이 되는 갈애를 제거하면 고가 사라진다는 가르침을 일컫는다멸성제는 초기불교의 궁극목적을 드러낸 것으로써 노력하면 모든 번뇌로부터 벗어난 열반(涅槃)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이상향을 제시해 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또한 멸성제는 고의 원인인 갈애의 속박에 대해서 무력하지 않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가르침으로서 열반이라는 말로 표현해도 무방하기 때문에 멸성제는 내적으로 고요해진 심리적정서적 상태를 가리키며이것은 선정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경지이기도 하다.

우리는 깨달음을 통해서 일시적으로 평온해진 마음의 상태를 영구적으로 확장시킬 수가 있고장기간에 걸친 집중적인 명상은 번뇌로부터 정화되었다고 하는 느낌을 갖게 해주는 것도 사실이다그러나 깨달음 혹은 지혜가 뒷받침 되지 않은 명상의 효력은 언젠가는 흐트러지고 만다지속적으로 평온한 마음을 유지하려면 지혜의 성취가 필요하며따라서 내면적인 적정의 경지인 멸성제 혹은 열반이라고 하는 것은 지혜의 성취와 더불어 얻게 되는 궁극적인 평안의 경지라고 할 수 있다.


갈애가 일어나지 않는 멸의 적정한 열반 경지는 집착을 버리면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 집착은 버리고 싶다고 하여 쉽기 버려지는 것이 아니다열반 적정의 경지는 팔정도(八正道수행을 통해야 집착이 소멸되면서 도달할 수 있다는 가르침이 도성제이다따라서 팔정도는 고를 멸한 경지에 오르는 수행의 구체적인 실천 덕목으로써 정견정사유정어정업정명정정진정념정정 등을 이다


정견(正見)은 올바른 견해로서경전에 의하면 괴로움의 생기(生起), 괴로움의 소멸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방법에 대해 올바로 아는 것을 말한다.


정사유(正思惟)는 올바른 마음가짐올바른 생각이다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자는 올바른 견해와 함께 항상 올바로 생각하여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경전에서는 정사유의 구체적인 내용으로서 성내는 마음살해하려는 마음세속적인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부드러운 마음자비의 마음청정한 마음으로 불교를 신봉하고 실수(實修)하기 위해 끊임없이 생각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정어(正語)는 올바른 언어적 행위를 의미하며올바른 견해올바른 마음가짐과 함께 행하는 언어적 행위를 말한다인간의 일상적 언어생활에서 볼 때 거짓된 말(妄語), 험담이나 욕(惡口), 중상 모략하는 말(兩說), 쓸데없는 말(綺語등 네 가지를 떠나는 말이며나아가 다른 사람들을 올바르게 가르치고 칭찬하며성실한 말로써 다른 사람과 접하고 반드시 해야 할 말만 하는 것 등이다.


정업(正業)이란 올바른 신체적 행위로서 살생도둑질(偸盜), 음란한 행위(邪淫)를 떠나는 것으로적극적으로는 타인의 생명을 구하고 재물을 보시하며 스스로 인륜도덕을 행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실천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정명(正命)이란 그릇된 생활을 버리고 올바른 종교적 생활을 실천하는 것이다특히 출가 수행자의 경우 신앙에 근거한 재가신자의 보시를 받아 규칙 바른 출가 수행생활을 해야 하는 것이다


정정진(正精進)이란 올바른 노력올바른 용기를 말한다올바른 노력올바른 용기는 올바른 생각올바른 말올바른 행위 등을 실천하기 위해서도 필요불가결한 것이다불교의 목적은 번뇌에 의한 망집(妄執)을 떠나 깨달음에 도달하는 것인데일반적인 그러한 목적에 도움이 되는 것이 선()이고 장애가 되는 것이 악()이라고 할 때그러한 선과 악에 대한 올바른 노력용기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측면에서 고려될 수 있다

⑴ 이미 존재하고 있는 선에 대해서는 그것을 지속하고 더욱 증대시켜 완전한 것이 되도록 노력하는 것

⑵ 아직 존재하지 않는 선에 대해서는 그것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것

⑶ 지금 현재 존재하고 있는 악에 대해서는 이것을 감소시켜 단절하려고 노력하는 것

⑷ 아직 존재하지 않는 악에 대해서는 이것을 일어나지 않게 하려고 노력하는 것 등이다


정념(正念)이란 올바른 기억을 말하는데올바른 생각 내지는 올바른 선정을 실천하기 위하여 자기 자신이나 주위의 사물을 올바로 알고 올바로 유의하는 것을 의미한다항상 자기 자신을 반성하며 올바른 의식을 가지고 행동하는 것이며 부주의하여 멍청하지 않은 것이다


정정(正定)이란 올바른 선정으로 심일경성(心一境性)이라고도 할 수 있는 정신통일을 말한다.. 경전의 해설에 따르면 수행자가 모든 욕망을 끊고 초선(初禪), 이선(二禪), 삼선(三禪), 사선(四禪)의 선정을 얻는 것이라고 말하는데정정은 이처럼 전문적인 수행자에 의한 선정과 함께 일반적인 정신집중정신통일을 의미한다올바른 견해올바른 말올바른 생활 등의 항목은 모두 이 같은 올바른 정신집중에 의해서만 비로소 완전하게 수행될 수 있는 것이다.


불기2562년 1

도명(배호식합장


이송영
2019-10-10
조회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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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생명은 부처이어라

  부처님의 가르침을 처음으로 

 만나는 분에게 드리는 조그마한 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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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라이 라마의 반야심경과 그 가르침

 은 35페이지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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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리글


 부처님의 궁극적 가르침인 참모습(實相실상)에 대한 성철스님의

 간결하고도 명확한 말씀으로 머리글을 대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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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는 원래 구원되어 있습니다.

자기가 본래 부처입니다.

자기는 항상 행복과 영광에 넘쳐 있습니다.

극락과 천당은 꿈속의 잠꼬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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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하고 무한합니다.

설사 허공이 무너지고 땅이 없어져도 

자기는 항상 변함이 없습니다.

유형有形무형無形 할 것 없이 

우주의 삼라만상이 모두 자기입니다.

그러므로 반짝이는 별춤추는 나비 등이 모두 자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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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를 바로 봅시다.

모든 진리는 자기 속에 구비되어 있습니다.

만약 자기 밖에서 진리를 구하면

이는 바다 밖에서 물을 구함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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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는 영원하므로 종말이 없습니다.

자기를 모르는 사람은 세상의 종말을 걱정하며 

두려워하여 헤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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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를 바로 봅시다자기는 본래 순금입니다

 욕심이 마음의 눈을 가려 순금을 잡철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나만을 위하는 생각은 버리고 힘을 다하여 남을 도웁시다.

욕심이 자취를 감추면 마음의 눈이 열려서

순금인 자기를 바로 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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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를 바로 봅시다.

아무리 헐벗고 굶주린 상대라도 그것은 겉보기일 뿐,

본 모습은 거룩하고 숭고합니다.

겉모습만 보고 불쌍히 여기면

이는 상대를 크게 모욕하는 것입니다.

모든 상대를 존경하며 받들어 모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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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를 바로 봅시다.

현대는 물질만능에 휘말리어 자기를 상실하고 있습니다.

자기는 큰 바다와 같고 물질은 거품과 같습니다.

바다를 봐야지 거품은 따라가지 않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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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를 바로 봅시다.

부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 아니요,

이 세상이 본래 구원되어 있음을 가르쳐주려고 오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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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크니 큰 진리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참으로 행복합니다다 같이 길이길이 축복합시다.


 부처님이 보낸 엽서 마음 부처님이 보낸 엽서 마음  2


  중생의 마음은 본디 부처이기 때문에

 항상 잊지 않고 부처를 생각하면

 금생과 내생에 반드시 부처를 볼 수 있으리.

 若衆生心憶佛念佛現前當來必定見佛 [능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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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이란 허공과 같이 광대무변하고 무장무애(無障無碍)하여

 그 무엇에도 걸림이 없고 아무런 자취도 없는 것인데

 그렇다고 다만 허무하게 비어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실상은 무한한 능력을 원만히 갖춘 생명의 광명으로써

 바로 불성(佛性), 곧 부처님인 것입니다

 경전에 이르신 바,

 "마음이 바로 부처요부처가 곧 마음"입니다.

 그리고 인간을 비롯한 일체 만유(萬有)는 모두 한결같이 

 불성의 광명으로 이루어진 화신(化身부처님이며우주의 

 실상은 바로 장엄 찬란한 연화장세계요극락세계인 것입니다.

 [청화스님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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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깨어있는 마음과 가없는 마음만이 

 탐욕과 성냄어리석음의 불을 완전히 꺼

 괴로움 한 가운데서도 깊은 마음의 평화를 경험한다.

 이는 오랜 시간에 걸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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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르침의 도리를 잘 이해한 사람이 자유의 경지에 이른

 다음에 할 일이 이것이니방편의 가르침에 유능하고,

 진리에 의지하여 솔직하고 몸과 마음이 청정할 것좋은

 말을 하고 유화하고 거만하지 않을 것족한 것을 알고 

 과욕(寡欲)할 것잡스런 일에 매이지 않고 간소하게 

 살아갈 것오근이 청정하여 총명 겸허할 것더러운 

 짓을 하여 식자의 비난을 사지 말라서로 남을 속이지

 말며 어디의 누구에게라도 경멸하는 생각을 지니지 말라.

 분하다든지 또는 밉다 하여 남이 고통에 빠질 것을 원하

 지 말라.

 오직 이런 자비심을 닦을지니,

 일체의 생명 모든 사람에게

 행복과 평화와 은혜 있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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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치 어머니가 그 외아들을 자기 목숨을 걸어 지키는 것처럼

 일체의 생명또는 사람에게 끝없는 자비심을 베풀어라.

 [잡아함경]


 부처님이 보낸 엽서 마음 부처님이 보낸 엽서 마음  4


 네 가지 일이 있나니,

 마음이 삿()되려 할 때 그것을 따르지 않고,

 마음이 음탕하려 할 때 그것을 따르지 않으며,

 생각이 약해지려 할 때 그것을 따르지 않고,

 생각이 부귀해지려 할 때 그것을 따르지 않는 것이다.

 또 네 가지 일이 있나니,

 마음에 항상 죽는 것을 근심함이요,

 마음에서 나쁜 짓하고 싶어 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는 것이요반드시 마음을 살핌이요,

 마음이 사람을 따르게 하되 

 사람이 마음을 따르게 하지 말라.

 마음은 사람을 그릇되게 만들며마음은 몸을 죽이며,

 마음이 아라한도 되고마음이 하늘도 되고,

 마음이 사람도 되며,

 마음이 축생벌레개미짐승도 되고,

 마음이 지옥도 되고마음이 아귀도 되나니,

 모양이 있는 것은 모두 마음이 만든 것이다

 내가 지금 부처가 되어 하늘에서나 인간에게서

 공경을 받는 것도 모두 마음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불반니원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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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저 부처라 법이라 천당이라 극락이라 

 지옥이라 축생이라 아귀라 하는 것을

 어찌 다른 곳에 나아가서 찾기를 구하리오

 사람사람이 본래 가지고 있는

 내 마음에 모두 있는 것이니 

 이 마음밖에 또 다시 구할 것이 없기에

 부처와 부처님이 이 마음을 깨달아 아시고

 중생에게 보이시건만

 중생은 이 마음을 잘 알지 못하여 

 중생수(衆生壽)에 있어서 닦기를 힘쓰지 않는 고로

 혹 지옥과 아귀와 축생과 하늘과 인간 사람과 

 수라에 돌아다녀 가고오고 하나니,

 이 마음을 잘 닦으면 

 부처된다고 가르치신 것이 법이니라.

 불법(佛法)은 공부가 아니라 마음입니다

 다만 '마음씀씀이'의 끊임없는 수행(修行)이요

 정진(精進)입니다.

 [활안스님 어록]

 .....................................

 불교에서 중요하게 강조하는 것은 마음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그런 변화는 명상瞑想에 달려 있으며제대로 명상을 하기 위해

 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담긴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부처님이 보낸 엽서 마음 부처님이 보낸 엽서 마음  6


나는 마음보다 빠른 어떤 법도 보지 못했다

그것은 무엇으로 비유할 수가 없다

마치 원숭이가 나무를 탈 때 하나를 놓자 다른 하나를 잡아

마음이 안정되지 않는 것처럼 마음도 이와 같아서

앞생각과 뒷생각이 동일하지 않은 것은 

어떤 방편으로도 모색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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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돌아다니는 것은 정말로 빠른 것이다

그러므로 항상 마음을 항복 받아서 

착한 길로 나아가도록 공부해야 한다.

 [중일아함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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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은 아주 쉽게 탐닉합니다

 반대로 마음은 또 아주 쉽게 거부합니다.

 마음은 아주 쉽게 극단으로 움직입니다

 마음이 중도(中道)에 머무는 것,

 바로 중도에 있는 것이 가장 어렵습니다

 마음에 있어 그것은 자살이기 때문입니다

 중도에서 마음은 죽고 

 무심(無心,순수 의지깨어있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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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때문에 부처님은 그의 길을 '중도(中道)의 길'

 이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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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탐욕을 정확히 알면 탐욕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탐욕을 거부할 필요가 없습니다.

 거부는 오직 탐욕이 무엇인지 모를 때나 필요합니다.

 광적인 탐닉은 습관의 반복을 낳고거부는 더 강력한 

 탐닉을 낳습니다. 

 만일 그대가 욕심이 많다면

 그 욕심을 들여다보시기 바랍니다.

 만일 그대가 화가 났다면 

 그 분노를 들여다보십시오.

 그대가 어디에 있든 

 그 속을 들여다보시기 바랍니다.

 그 안을 들여다보면서

 그것을 통과해 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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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일 그대가 두려움 없이 눈을 뜬 채로 

 탐욕욕정분노질투를 통과해 갈 수 있다면

 그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입니다

 [오쇼 라즈니쉬 강의록]


 부처님이 보낸 엽서 마음 부처님이 보낸 엽서 마음  8


 불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마음을 바꾸라는 것

 입니다탐욕적 소유론의 욕망에서부터 희망과 원력

 願力의 존재론적 욕망으로 마음의 혁명을 이룰 것을 요구

 합니다.

 세상은 객관적으로 내 앞에 놓여 있는 의식의 실재적 대상

 이 아니라마음의 욕망이 환상적으로 그리고 있는 사이버

 cyber 시공時空의 코드에 지나지 않습니다.

 세상은 대상이 아니고 중생들이 제각각 그리고 있는 상상의

 차원입니다따라서 세상을 복락의 시공으로 바꾸고 싶으면

 세상을 복락의 욕심으로 지배하려고 애쓰지 말고세상을

 보는 마음을 소유所有에서 존재存在로 전환해야 합니다.

 

 일체만유一切萬有를 존재론적으로 보는 방법은

 일체개공一切皆空의 사상에 토대를 두어야 하는바,

 이런 마음의 전환을 존재론적 혁명이라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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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욕無欲은 소유론적 욕망을 존재론적 욕망으로 전환시키는

 것이지 아예 없애버리는 것이 아닙니다그런 일은 불가능

 합니다우리가 욕계欲界에 있는 한 그런 일은 불가능한 요

 구입니다무욕은 소유론적 무의식적 욕망을 존재론적 무의

 식적 욕망으로 방향을 달리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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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를테면 바깥의 것을 쟁취하겠다는 소유의 욕망을 내

 마음 안에 이미 깃들어 있는 자비의 마음으로 바꾸어,

 이웃이나 심지어 무정중생無情衆生들에게까지 나누어 

 주려는 마음으로 방향을 바꾼다면 그것이 곧 대승大乘

 입니다.

 존재의 욕망은 자비慈悲를 나누려는 마음입니다.

 [원효의 대승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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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중생(衆生)의 세계는 모두가 삼세(三世안에 있고

 삼세의 중생들은 모두 오온(五蘊중에 있으니

 모든 온()은 업()이 근본이요모든 업은 마음이 근본이니

 마음이란 꼭두각시와 같으며 세간(世間)도 그러합니다......

 마음과 부처와 중생과는 서로 차별이 없으며

 서로 다함이 없습니다.

 마음이 모든 세간을 짓는 줄을 아는 이가 있다면

 이 사람은 부처를 보아 부처의 참성품을 알게 되며,

 마음이 몸에 있지 않고 몸도 마음에 있지 않지만

 모든 불사(佛事)를 능히 지어 자재함이 미증유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삼세의 일체 부처님을 알려면 마땅히

 법계의 성품 모든 것이 마음으로 된 줄을 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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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엄경


 부처님이 보낸 엽서 자비 부처님이 보낸 엽서 자비 10


 모든 중생의 마음 성품이

 본래 깨끗함을 아는 것을 사랑()이라 하고,

 온갖 것은 평등하기가 

 허공 같다고 보는 것을 슬픔()이라 하며,

 온갖 기쁨을 끊는 것을 

 기쁜 마음()이라 하고

 온갖 행을 멀리함을 

 버린 마음()이라 하며,

 모든 법은 미래 세상에는 깨끗하고

 과거에는 갖가지며

 현재에는 ''가 없느니라.

 선남자야

 만일 이러한 법을 진실로 관찰하여 분명히 안다면

 이것을 보리심(菩提心)을 뚫는 것이라 하나니

 보살이 이 모든 법을 관찰하고 나서는 

 차례로 온갖 법 자재(自在)로운 다라니를 얻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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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방등대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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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깨달음에 이르는 데는 오직 두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지혜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자비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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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즉 하나는

 자기 자신을 속속들이 지켜보면서

 삶을 거듭거듭 개선하고 심화시켜 가는

 명상(暝想)의 길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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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하나는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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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지혜와 자비의 길을 통해서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지녀온

 불성과 영성의 씨앗이 맑고 향기롭게 꽃피어납니다.

 

 본래 청정한 우리 마음을 

 명상과 나눔으로 밝혀야 합니다

 [법정스님 어록]


 부처님이 보낸 엽서 자비 11 부처님이 보낸 엽서 자비 12


 소원을 들어주는 보석(如意寶珠)보다 귀한

 생명가진 모든 존재들의 행복을 위해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려는 결심으로

 내가 항상 그들을 사랑하게 하소서

 

 언제나 내가 누구를 만나든

 나를 가장 낮은 존재로 여기며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그들을 더 나은 자로 받들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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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모든 행동을 스스로 살피게 하고

 마음속에 번뇌가 일어나는 그 순간에

 그것이 나와 다른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린다면

 나는 당당히 맞서 그것을 물리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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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늘진 마음과 고통에 억눌린

 버림받고 외로운 자들을 볼 때,

 나는 마치 금은보화를 발견한 듯이

 그들을 소중히 여기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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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 시기하는 마음 때문에

 나를 욕하고 비난하며 부당하게 대할 때

 나는 스스로 패배를 떠맡으며

 승리는 그들의 것이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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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도움을 주었거나

 큰 희망을 심어 주었던 자가

 나에게 상처를 주어 마음을 아프게 하여도

 여전히 그를 나의 귀한 친구로 여기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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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접간접으로 나의 모든 어머니들에게

 은혜와 기쁨 베풀게 하시고

 내가 또한 그들의 상처와 아픔을

 은밀히 짊어지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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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덟 가지 세속적인 관심에 물들지 않아

 모든 것이 때 묻지 않게 하시고,

 또한 이 모든 것이 헛된 것임을 깨달은 나는

 집착을 떨쳐 버리고 

 모든 얽매임에서 자유롭게 하소서.

 [달라이라마 어록]


 부처님이 보낸 엽서 자비 13 부처님이 보낸 엽서 자비 14


 대자비(大慈悲)를 갖는 일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들이 행복을 바라고

 고통을 피하려고 한다는 단순한 깨달음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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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깨달음을 바탕으로 한 대자비는 

 이기주의나 편협한 마음에 빠지지 않도록

 우리를 계속 깨우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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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기심과 다른 사람을 이기려는 욕망을 던져버려라

 대신 그들을 도와주려고 노력하라

 친절한 마음과 용기자부심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도와주고,

 미소 띤 얼굴로 그들을 환영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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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직하라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뿐 아니라 

 오른손도 모르게 할 때그때야말로

 그 선함이 우리의 몸과 영혼에

 완전히 녹아들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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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라이라마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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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죽고침묵도 죽고

무한자(無限者)마저도 죽지만

참으로 님[佛性]을 사랑하는 이는 죽는 걸 모른다.

그대가 침묵 속으로 들어가면모든 것이 무()라는 것을

자각하게 되면 공()과 무()를 체험하게 된다

하지만 ''는 아직도 떨어져 있는 존재다.

'아는 자'가 아직도 떨어져 있다는 말이다.

아직까지 공()은 자각과 지각의 '대상'이다.

자신이 무()가 되었다는 것을 아는 놈은 누구인가 ?

이러한 경지를 체험한 놈은 누구인가 ?

''가 '아는 자'가 아직도 떨어져 있다.

아직도 이중성이 남아 있다는 말이다.

이중성이 있는 한죽을 수밖에 없다.

오직 사랑[慈悲]만이 죽지 않는다.

사랑 안에서는 먼저 '사랑하는 이'가 죽어야 하기 

때문이다그래야만 진실한 사랑이 우러나온다.

자신도 신[佛性]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오직 사랑만이 존재하는 순간에 

참된 사랑[慈悲]은 태어난다.

 [오쇼 라즈니쉬 강의록]


 부처님이 보낸 엽서 연기 15 부처님이 보낸 엽서 연기 16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긴다.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하므로 저것이 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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此有故彼有 此生故彼生 此無故彼無 此滅故彼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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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처님께서는 "연기(緣起)를 보면 법을 보고법을 보면 여래를

 본다"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것과 저것나와 너지구와 우주가 서로 의존하면서 무아(無我로 존재한다는 것이 연기법입니다연기의 도리가 펼쳐지는 자리

 는 모든 존재가 무()로 비워지는 자리입니다.

 연기세계의 참 모습은 나다/너다있다/없다좋다/싫다 같은 상대

 적인 세계와 모든 이것과 저것을 동시에 떠나 있기에 중도(中道라고도 합니다.

 초기불교와 대승불교의 핵심은 바로 이 '중도연기中道緣起'입니다.

 모든 존재의 바탕이 연기법이라는 사실에 명확히 눈 뜨게 되면

 동체자비(同體慈悲)의 실천행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옵니다.

 연기적 깨침이란

 ''와 ''을 가르는 울타리가 무너지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출처 : <조계종 수행의 길 간화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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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것은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의 극단이다.

 '모든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도 또 하나의 극단이다.

 깟차야나여여래는 그러한 양 극단에 의지하지 않고 중도中道로 법을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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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명無明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

 형성形成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나고,

 의식意識을 조건으로 명색名色이 생겨나고,

 명색名色을 조건으로 감역六入이 생겨나고,

 감역感域을 조건으로 접촉이 생겨나고,

 접촉接觸을 조건으로 감수가 생겨나고,

 감수感受를 조건으로 갈애渴愛가 생겨나고,

 갈애渴愛를 조건으로 취착取著이 생겨나고,

 취착取著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나고,

 존재存在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생겨나고,

 태어남을 조건으로 노사老死와 같은 

 모든 괴로움의 요소가 생겨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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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깟차야나여참으로 올바른 지혜로써 '있는 그대로의 세상의 발생發生'을 관찰하면 세상에서의 무는 없어진다

 깟차야나여참으로 올바른 지혜로써 '있는 그대로의 세상의 소멸消滅'을 관찰하면 세상에서의 유도 없어진다


 부처님이 보낸 엽서 연기 17 부처님이 보낸 엽서 연기 18


 무명無明이 남김없이 사라져 없어지면 형성이 소멸하고

 형성이 소멸하면 의식이 소멸하고

 의식이 소멸하면 명색이 소멸하고

 명색이 소멸하면 여섯 감역이 소멸하고

 여섯 감역이 소멸하면 접촉이 소멸하고

 접촉이 소멸하면 감수가 소멸하고

 감수가 소멸하면 갈애가 소멸하고

 갈애가 소멸하면 취착이 소멸하고,

 취착이 소멸하면 존재가 소멸하고

 존재가 소멸하면 태어남이 소멸하고

 태어남이 소멸하면 늙고 죽음슬픔비탄

 괴로움우울절망이 소멸한다.

 이와 같이 모든 괴로움의 다발[五蘊]들이 소멸한다.

 이것을 수행승들이여,

 괴로움의 소멸의 거룩한 진리(苦滅聖諦)라고 한다.

 .............................................................

 []의 시작으로의 올바른 견해[正見]

 진리에 따르는 올바른 견해라 부르며,

 []의 종극으로서의 올바른 견해[正見]

 진리를 관통하는 올바른 견해라 부릅니다.

 사성제(四聖諦:///)의 진리에 대한 초보적 이해가

 그 진리에 대한 관통으로 도달하기 위해서는,

 윤리적 실천[:正語/正業/正命]

 정신적인 집중[:正精進/正念/正定],

 그리고 지혜의 개발[:正見/正思惟]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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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속적인 올바른 견해는 

 행위의 주체를 자신으로 하는 올바른 견해로써 시작합니다.

 [무지한 자에게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생겨난다면,

 그가 만든 그러한 업()은 크거나 작거나 

 무릇 자신이 받아야 하며 남이 받을 수 없다....

 모든 존재는 

 ()의 소유자이며

 업의 상속자(相續者)이며

 업을 모태(母胎)로 삼는 자들이며,

 업을 친지(親知)로 하는 자들이며,

 업을 의지처(依持處)로 하는 자임을 알아야 한다.]

 ...................................................................

 ()과 업보(業報)에 관한 올바른 이해는 

 윤회의 한계 안에서 선한 행위를 추구하고

 보다 높은 존재 상태를 얻는 데 합리성을 제공하지만 

 그 자체로서 해탈로 이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생성적 윤회의 전과정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해탈은 

 모든 형태의 윤회를 구성하는 

 연생(緣生)의 특성에 대한 깊은 통찰에 의존합니다.

 성스런 올바른 견해는 이러한 해탈로 이끄는 것인데,

 사성제에 대한 통찰에 바탕을 둔 세계관을 의미합니다.

 "수행승들이여괴로움을 통찰하고 괴로움의 발생을 통찰하고

 괴로움의 소멸을 통찰하고 괴로움의 소멸로 가는 길을 통찰하는 것이것을 수행승들이여올바른 견해라고 부른다." 


 부처님이 보낸 엽서 () 19 부처님이 보낸 엽서 ( ) 20


 온갖 겉모양은 모두가 허망하니

 모양이 모양 아닌 줄 알면

 바로 여래를 보리라.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 諸相非相 卽見如來[금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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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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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공을 뜻하는 슈나타shunyata를 크게 오해합니다.

공이라고 하면 '허무'라는 부정적인 느낌을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비었다'라는 말을 들으면 뭔가 부정적인 느낌을 받습니다.

하지만 부처님이 말하는 공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긍정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충만함'보다도 더 긍정적인 것입니다왜냐하면,

의 경지에서야말로 완전한 자유自由가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비워 냈기 때문에 걸림이 없습니다.

모든 경계境界가 사라졌습니다공속에는 경계가 없습니다.

이렇게 경계가 없는 공간에서만 진정한 자유가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이 말씀하시는 공

보이는 것의 부재不在이면서 보이지 않는 것의 현존現存입니다

 [오쇼 라즈니쉬 강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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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이제 너희들을 위해 설법하리라

 이것은 처음도 좋고중간도 마지막도 좋으며(初善中善後善)

 좋은 뜻과 좋은 의미로서 순수하고 하나같다

 원만하고 깨끗하여 범행이 청정한 것이다

 그래서 제일의공경(第一義空經)이라고 한다

 제일의 이란 무엇인가?

 ()은 생길 때에도 온 곳이 없고멸할 때에도 간 곳이

 없다이와 같이 눈은 진실이 아니면서 생기고생겼다가는

 다 소멸하나니 업보(業報)는 있지만 지은 자가 없느니라

 이 쌓임이 소멸 하고 나면 다른 쌓임이 이어 받나니 세속의 

 범주와는 다르다뜻에서도 마찬 가지이다

 세속의 범주란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이것이 

 일어나기 때문에 저것이 일어난다'는 것이니무명(無明)을 

 인연하여 행위가 있고행위를 인연하여 의식이 있다.

 이렇게 전개되어 고통이 생긴다

 그리고 '이것이 없기 때문에 저것이 없고이것이 소멸하기 

 때문에 저것이 소멸한다'는 것이니, 무명이 소멸하기 때문에

 행위가 없고행위가 소멸하기 때문에 의식도 소멸한다

 이렇게 전개되어 고통도 없어지는 것이다.

 이것을 第一義空經이라 한다.

 [잡아함경]


 부처님이 보낸 엽서 () 21 부처님이 보낸 엽서 ( ) 22


 "나는 자아(自我)가 없음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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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존재의 핵심에 있던

 자아처럼 보이는 고정된 실재(實在)를 투과하면서

 나는 자아가 없음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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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이것이 나를 파멸시키지는 않았다.

 오직 나의 고통(苦痛)만을 파괴했다.

 나는 해방(解放)을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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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너희는 내가 한 말을 믿을 필요는 없다.

 너희 스스로 자기의 본성(本性)을 깨달아야만 

 무아에 이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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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희 스스로 진리를 찾아라.

 너희 안에 있다고 생각하는 자아를 온 힘을 다해 

 찾고 증명하고 설명하라.

 그리고 자아를 찾았다면 내가 틀렸다고 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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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말들은 무시하라.

 자아의 핵()을 찾는 과정에서 마주치는 것마다 녹아버려도 포기하지 말고 점점 더 깊이 찾아들어 가라.

 마지막에 도달한 순수의식(無心)의 정점에서도,

 내가 그랬듯극소로 영속하는 핵으로 된 자아를

 못 찾는다 해도 두려워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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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공()을 대면하라.

 그것이 궁극에 이르는 발판임을 잊지 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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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수의식으로 된 자아를 집중해서 보라.

 그러면 자아가 너를 놓아 주리라.

 그때 비로소 너희는 다른 모든 존재와 서로 긴밀히 연결된 무한한 망()의 한 부분임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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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고 난 후 너희는 상대적인 자아(의 實顯)로서 행복 안에서 살아갈 것이다.

 다른 존재들이 스스로의 복된 자유와 행복을 찾도록

 도와줄 정도로 자유로워질 것이다.


 부처님이 보낸 엽서 () 23 부처님이 보낸 엽서 ( ) 24


 부처님께서는 무상(無常)과 무아(無我)의 가르침을

 실제의 문[實相]을 열 수 있는 열쇠로 제시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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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상'은 시간의 관점에서 하는 말이고,

 '무아'는 공간의 관점에서 하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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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상'을 깊게 살펴보면

 사물은 원인과 조건이 변함에 따라 변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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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아'를 깊게 살펴보면,

 우리는 우리가 아닌 요소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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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물은 무상하고 자아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사물은 생과 사를 경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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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그것들을 철저하게 접해보아야만 

 생사영원과 무상 그리고 자아와 무아를 

 벗어난 존재의 근거를 접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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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다를 보면 

 각각의 파도에는 시작과 끝이 있음을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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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의 파도는 높고 낮음시작과 끝그리고 미추(美醜)라는 표시를 통해 다른 것과 구분됩니다.

 그러나 바다의 세계에는 표시라는 것이 따로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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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대적인 진리의 세계에 있는 파도는 솟아오를 때는 행복을 느끼고 부셔져 내릴 때는 슬픔을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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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도는 "나는 높은 파도다"

 또는 "나는 낮은 파도다."라고 생각하고는 

 우월감 또는 열등감을 가질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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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파도가 자신의 참된 본성

 즉 자기가 곧 바다라는 것을 알면

 모든 강박관념을 멈추게 될 것이고

 파도는 생사를 초월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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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탁닛한 스님 어록]


 부처님이 보낸 엽서 () 25 부처님이 보낸 엽서 ( ) 26


 우리는 이 우주 안에서 자기 자신을 가장 소중한

 존재라고 봅니다자아(自我)가 원래부터 고유하게

 존재한다는 잘못된 믿음에 그 뿌리를 둔 망상은 

 카르마()적 행동을 낳으며이는 윤회계(輪廻界)

 안에서 계속 고통을 받도록 우리를 얽어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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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아가 독립적으로 따로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이러한 본능적인 태도는 나와 다른 사람을 구분하게

 되며이것은 욕망과 미움을 불러 일으켜 쉽사리

 부정적인 행동에 빠지게 되고 그 결과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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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이런 자아가 대체 어디에 있는지 찾고자 하면,

 그것은 우리를 현혹시키면서 숨어 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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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처님은 그러한 자아는 존재하지 않으며,

 독립적인 자아가 있다는 우리의 믿음이

 바로 모든 괴로움()의 뿌리라고 가르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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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스려지지 않은 마음 때문에 일어난 망상(妄想)

카르마()적인 행동으로 생긴 고()의 근원은 

바로 무지(無智)에서 비롯된 것이며현상의 본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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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못 이해하고 자신을 하나의 실재하는 자아로 잘못

 이해해서 생기는 것 인만큼우리 마음속에 본래부터

 자아는 존재하지 않음을 깨닫게 하는 지혜를 불러

 일으킴으로써 무지를 제거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목적을 위해서 우리는

 첫째로깊은 명상과 집중을 통해 마음의 안정을

 얻어야 하고[]

 둘째로순수한 도덕적 계율을 지켜 부정적인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하며[]

 셋째로자아가 없음을 깨닫는 수행즉 지혜를 닦는

 수행[]으로 나아가야 한다

 부처님은 가르치십니다

 [달라이라마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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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갖 유위(有爲)의 법은

 꿈같고 그림자 같고

 꼭두각시 같고 거품 같으며 

 이슬 같고 번개 같으니

 이러한 것임을 관찰하여라.

 一切 有爲法이 如夢幻泡影하며

 如露亦如電이니 應作如是觀이니라.

 [금강경]


 부처님이 보낸 엽서 윤회 ․ 업 27 부처님이 보낸 엽서 윤회 ․  28


 모든 중생들에게 한없이 오랜 과거로부터 

 나고 죽음이 계속되는 것은

 항상 머무르는 참마음(佛性)의 맑고 밝은 본체를

 알지 못하고 허망한 생각이 작용하는 탓이니

 이 허망한 생각은 참되지 못하므로

 나고 죽는 세계를 윤회(輪廻)하는 것이다.

 [능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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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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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의 삶을 비롯한 세상의 물질이나 현상즉 자연의 이치를 

 살펴보더라도 그냥 없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물이 끓어 수증기로 증발했다고 해서 물 자체가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물은 수증기로 변할 것이고또 그것들은 우주 공간 

 어딘가에 다시 모여 구름이나 비안개 등으로 존재하게

 됩니다

 모든 존재하는 것은 순환(輪廻)하는 것이지 절대로 없어지지

 않습니다따라서 우리는 필연코 근본 자기면목(自己面目:佛性)

 찾아야만 합니다.

 [서암스님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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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수사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무슨 인연으로 모든 중생들이 허망한 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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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처님께서 답하셨다.

 "아견(我見:我相)을 가진 중생이 

 허망한 윤회를 받는 것이니,

 무슨 까닭인가 하면

 무시이래로 계교와 집착을 일으켜서

 남과 나를 분별하기 때문이다.

 또 어리석은 중생이 허망한 윤회를 받는 것이니,

 왜 그런가 하면 어리석은 중생은 최상의 

 적정법(寂靜法)을 듣지 못하고 알지 못해서 

 삼업(三業)을 경계하여 깨치지 못하고

 몸과 입과 뜻을 방자하게 하여 뭇 번뇌로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은 업을 짓는 까닭이다."

 [문수사리문법경]


 부처님이 보낸 엽서 윤회 ․ 업 29 부처님이 보낸 엽서 윤회 ․  30


삶은 결코 다함이 없는 영원한 흐름이라는 것을 

그대는 모른다죽음은 어디에도 없다.

단지 무지(無知)와 무명(無明)만 있을 뿐이다.

아무 것도 파괴되지 않고

아무 것도 창조되지 않는다.

그저 뭉쳤다가 흩어질 뿐이다.

뭉치는 것이 삶이요흩어지는 것은 죽음이다.

죽음이 수없이 그대를 찾아왔어도 죽음은 그대를 파괴하지 못했다그대는 있는 그대로(如如)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대는 죽음을 두려워한다.

그것이 겉보기에 죽음과 소멸처럼 보이는 것은

순전히 그대의 무명(無明때문이다.

'살아서 죽어라'

일어나는 모든 것은 꿈이다.[諸行無常諸法無我]

'죽기 전에 죽는 것[自我의 소멸]'

이것이 제대로 사는 법이며,

만물이 태어나기 전의 한 가지[眞理:佛性]로 

들어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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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쇼 라즈니쉬 강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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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존재는 인연 따라 태어나고

 모든 존재는 인연 따라 사라진다.

 불자가 그 이치를 따라 실행하면

 오는 세상에는 반드시 부처를 이루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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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교의 본질적 핵심은 연기법(緣起法)입니다.

 시작과 끝태어남과 죽음이 모두 연기의 상태요,

 불일불이不一不二의 관계입니다.

 연기적으로 보면 이 세상 그 무엇도 총체적인 존재

 아님이 없습니다.

 생성과 소멸소멸과 생성은 동전의 양면처럼 언제나

 불일불이의 관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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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의 실상을 여실如實이 통찰하면 끊임없는 생명활동

 이 있을 뿐 종말로서의 죽음이란 본래 있지 않습니다.

 죽음이란 인연 따라 이루어지는 생명의 활동현상이므로

 회피하거나 두려워해야 할 대상이 아닙니다.

 생명활동의 한 현상으로 받아들이고 나아가 새로운 

 태어남과 성장의 계기가 되도록 잘 가꾸어야 할 대상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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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법스님 강의록]


 부처님이 보낸 엽서 윤회 ․ 업 31 부처님이 보낸 엽서 윤회 ․  32


 착한 사람은 선을 행하고 

 선에서 시작하여 인자하고 효도하여

 즐거운 곳에서 즐거운 데로 들어가고 

 밝음에서 밝은 곳으로 들어간다.

 악한 사람은 악을 행하고 

 괴로움에서 괴로운 데로 들어가고 

 어둠에서 어둠으로 들어간다.

 이 이치를 누가 잘 알겠느냐.

 오직 부처님만이 보고 알아서 사람을 가르치지만

 믿는 이가 적어서 나고 죽음이 그치지 않고

 악취(惡趣)가 지속되는 것이다.

 [무량청정평등각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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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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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 생각()과 행동()이 

 생명의 근본자리(眞如佛性)를 여의고서는

 결코 깨어 있을 수 없습니다.

 항상 밝게 깨어 있으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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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처님이 나란타 동산 장촌나림을 방문하셨을 때 가미니라는 

 사람이 여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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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존이시여하늘의 신을 섬기는 다른 종교들의 사제들은 

 만일 중생이 목숨을 다하면 그를 천상에 태어나게 할 수 있다고들 말합니다세존께서는 법왕이시니 부디 목숨을 마친

 중생이 천상에 태어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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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자 부처님께서 대답대신 가미니에게 이렇게 되물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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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를 들어 마을에서 멀지 않은 곳에 깊은 연못이 있다고 하자어떤 사람이 크고 무거운 돌을 그 속에 던져 넣었다그리고 많은 사람이 와서 합장하고 축원하기를 '돌이 떠오르게 하여 주소서'라고 했다그러면 과연 그 돌이 떠오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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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닙니다세존이시여많은 사람들이 축원을 했다고 해서

 그 돌은 결코 떠오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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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가미니여어떤 사람이 게을러서 바르고 착한 일을 하지 않고 열 가지 나쁜 업을 지었다고 하자그를 위해 사람 들이 아무리 합장을 하고 천상에 태어나라고 축원을 했다고 해서 그가 천상에 태어날 수는 없다.

 그는 결국 연못에 빠진 무거운 돌처럼 악도에 떨어지리라."

 [중아함경]


 부처님이 보낸 엽서 참생명 33 부처님이 보낸 엽서 참생명  34


 진여(眞如또는 진리란 

 우주의 생명 그대로의

 여실하고 참다운 이치를 말합니다.

 우주의 참다운 생명인 진여는 

 그냥 보통 이치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생동하는 생명이기 때문에 

 진여불성(眞如佛性)이라고도 합니다.

 진여불성이라는 것은 시간적으로 봐서

 한도 끝도 없이 유구한 생명체이고,

 거기에 들어 있는 공덕으로 봐서는 

 만공덕(滿功德)의 자리입니다.

 그런 공덕이 들어 있는 자리,

 자비로운 기운지혜로운 기운,

 모두를 알 수 있고 할 수 있는

 그런 공덕이 들어 있는 자리가 진여불성 자리입니다.

 진여불성이것은 바로 우주의 생명이고

 모든 존재의 근원이기 때문에 

 아무리 미세한 것 속에도 다 들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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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화스님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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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생명인 참사람으로 나아갑시다.

 하루 밤 꿈같은 인간의 삶이 아닌

 참으로 불법에 귀의한 불교적 생명,

 즉 참생명으로 살아갑시다.

 참사람은 종교와 철학마저도 초월합니다.

 또한 시간과 공간도 초월하여 

 어디든지 걸리지 않고 

 저 구경(究竟)의 자리마저

 초월하여 자유자재합니다.

 본래 인간의 참모습은 

 생사도 없고 청정하고 아무것도 없는데서

 일체를 창조하며 자유자재합니다.

 [서옹스님 어록]

 .........................................................

 천지우주가 오직 하나의 실상이요,

 하나의 생명입니다.

 우리 인간의 본래 생명이 부처이기 때문에

 우리 생명 자체도 광명으로 충만해 있고,

 천지우주도 바로 빛으로 충만해 있습니다.

 내 생명과 우주의 생명은 둘이 아닙니다.

 우리의 본래 성품이 바로 불성(佛性)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든 간에 꼭 부처가 되어야 합니다.

 [청화스님 어록]


 반야심경 반야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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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般若波羅蜜多心經

 반야바라밀다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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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야심경과 달라이라마의 반야심경의 가르침

 


 반야심경 35 반야심경  36


 관 자 재 보 살 행 심 반 야 바 라 밀 다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蜜多

 시 조 견 오 온 개 공 도 일 체 고 액

 時 照見 五蘊皆空 度一切苦厄 

 사 리 자 

 舍利子 

 색 불 이 공 공 불 이 색

 色不異空 空不異色 

 색 즉 시 공 공 즉 시 색

 色卽是空 空卽是色

 수 상 행 식 역 부 여 시

 受想行識 亦復如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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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오온이 다 공함을 비춰 

 보아 일체 고액을 건너니라.

 

 사리자여,

 색과 공이 다르지 않고 

 공과 색이 다르지 않아,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니,

 식 역시 이러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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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야심경 37 반야심경  38


 사 리 자

 舍利子

 시 제 법 공 상 불 생 불 멸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불 구 부 정 부 증 불 감

 不垢不淨 不增不減 

 

 시 고 공 중 무 색 무 수 상 행 식

 是故 空中 無色 無受想行識 

 무 안 이 비 설 신 의 무 색 성 향 미 촉 법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무 안 계 내 지 무 의 식 계 무 무 명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無無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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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리자여,

 이 모든 법 공한 모습은 

 나지도 않고멸하지도 않고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고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느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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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까닭에 공 가운데 색 없어

 식이 없고,

 의도 없어 

 법이 없으니,

 안계가 없고 의식계 까지 없느니라.

 무명이 없으니 


 반야심경 39 반야심경  40


 역 무 무 명 진 내 지 무 노 사

 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

 역 무 노 사 진 무 고 집 멸 도 

 亦無老死盡 無苦集滅道

 무 지 역 무 득 이 무 소 득 고

 無智亦無得 以無所得故

 보 리 살 타 의 반 야 바 라 밀 다

 菩提薩陀 依般若波羅蜜多 

 고 심 무 가 애 무 가 애 고 

 故心無碍 無碍故 

 무 유 공 포 원 리 전 도 몽 상

  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

 구 경 열 반

 究竟涅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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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명 다됨 역시 없으며,

 노사가 없으니 노사가 다됨 역시

 없고고집멸도가 없으며,

 지혜도 없고 또한 얻음도 없나니,

 얻을 것이 아예 없기 때문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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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리살타가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는 까닭에 

 마음에 걸림이 없고걸림이 없는

 까닭에 두려움이 없어

 전도된 망상을 멀리 여의고

 마침내 열반을 이루며


 반야심경 41 반야심경  42


 삼 세 제 불 의 반 야 바 라 밀 다

 三世諸佛 依般若波羅蜜多

 고 득 아 뇩 다 라 삼 먁 삼 보 리

 故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고 지 반 야 바 라 밀 다 시 대 신 주

 故知般若波羅蜜多 是大神呪

 시 대 명 주 시 무 상 주

 是大明呪 是無上呪  

 시 무 등 등 주 능 제 일 체 고

 是無等等呪 能除一切苦 

 진 실 불 허 고 반 야 바 라 밀 다

 眞實不虛故般若波羅蜜多

 즉 설 주 왈

 卽說呪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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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세제불도 반야바라밀다에 의지

 하는 까닭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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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므로 알아라반야바라밀다는 

 크게 신기로운 주이며

 가장 밝은 주이며위없이 드높은

 주이며이와 같은 것이 없는 

 주이니 일체 고액을 없애주고 

 진실하여 헛되지 않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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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곧 반야바라밀다주를 설하리라.


 반야심경 43 반야심경  44


 揭諦 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

 

 揭諦 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

 

 揭諦 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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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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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라이라마의 반야심경의 가르침 45 달라이라마의 반야심경의 가르침  46


 달라이라마의 반야심경의 가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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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야심경의 진수를 더욱 짧게 정리하여

 나타낸 것이 반야심경』 마지막에 나오는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라는 진언(眞言)입니다.

 산스크리트어로는 [가테 가테 파라가테 파라상

 가테 보디 스바하]라고 읽는데산스크리트어의

 [가테]는 [가라]는 뜻이니까 [가테 가테]는 

 [가라 가라]는 뜻이 됩니다.

 그리고 [파라가테]는 [피안으로 가라],

 [파라상가테]는 [피안으로 옳게 가라],

 [보디 스비하]는 [깨달음을 성취하라]

 뜻입니다

 이 진언의 의미를 다섯 가지 수행의 길 -

 차례대로 자량도(資糧道), 가행도(加行道), 견도

 (見道), 수도(修道), 무학도(無學道) -에 비추어

 생각해 보면

 [가라 가라]는 [자량도를 가라가행도를 가라]

 는 뜻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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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으로 [피안으로 가라]는 [세속을 초월한 

 피안의 경지로 가라]는 뜻이고이 단계에 이르

 면 성자의 지혜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그 지혜

 는 세속의 차원을 넘어선 것이고즉 [성자의

 차원으로 들어가는 견도를 가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피안으로 옳게 가라]는 세속을 초월한 성자의

 차원인 견도에 들어가 비로소 진리를 직접 체험

 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 뒤진리를 직접 보는 

 체험에 계속 마음을 길들여 가는 단계를 나타내

 고 있습니다이것이 네 번째 수행의 길인 수도

 (修道)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의 [깨달음을 성취하라]는 다섯 

 번째 수행의 길인 무학도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

 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라 가라하는 말을 듣고가기 위해

 서는 우선 어디서 어디로 가는지를 명확히 알

 필요가 있습니다.


 달라이라마의 반야심경의 가르침 47 달라이라마의 반야심경의 가르침  48


 [어디서] [어디로가느냐 만이 아니라 [누가]

 [어떤 수단으로가는지도 확실히 파악해 두어야

 합니다.

 출발점을 나타내는 [어디서]는 [윤회(輪廻)],

 목적지를 나타내는 [어디로]는 윤회의 고통을

 모두 없앤 [열반(涅般)의 경지]를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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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가세존은 초전법륜(初轉法輪:부처님이 부다가야의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을 얻은 뒤 녹야원에서 처음 설법한

 )에서 [사성제(四聖諦)]를 가르치셨습니다.

 첫 번째 진리인 고제(苦諦:고통에 관한 진리)와 두

 번째 진리인 집제(集諦:고통의 근원에 관한 진리)

 더러운 면에서의 진리입니다.

 우리는 번뇌의 영향을 받아 나쁜 짓을 행하고,

 번뇌와 나쁜 짓이라는 두 가지 원인에서 고통이

 라는 결과가 생긴다고 석가세존은 말씀하셨습니

 이렇게 해서 고통을 받고 있는 상태를 윤회

 라고 부르는데, [가라]는 진언이 나타내고 있는

 출발점이 바로 이 [윤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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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 번째 진리인 멸제(滅諦:고통의 소멸에 관한 진리)

 에서는 고통을 끊고 멸하는 것은 가능하며고통

 을 모두 멸했을 때 우리는 열반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수행을 쌓음으로써 성취해야 할 

 궁극적인 목적으로 되어 있는 열반의 경지가 

 바로 [어디로 가느냐]의 [어디], 즉 우리의 목적

 지가 됩니다.

 [어떤 수단으로윤회에서 열반의 경지에 이르는

 지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 네 번째 진리인 도제

 (道諦:고통의 소멸에 이르는 수행도에 관한 진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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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란 무엇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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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면 [누가윤회에서 열반을 향해 갈까요?

 그것은 우리 자신입니다

 [자기]라는 낱말로 표현되는 우리 자신이 깨달음

 이라는 열반의 경지를 향해 수행의 길을 걸어가

 는 것입니다.


 달라이라마의 반야심경의 가르침 49 달라이라마의 반야심경의 가르침  50


 그러면 []라는 말로 자신을 표현할 때그런

 []라는 존재는 어떤 것으로서 우리 마음에 

 파악되고 있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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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통 []라는 강한 자아의식은 항상 우리 마음

 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나는 한국인이다], [

 는 남자다], [나는 여자다], [나는 청년이다]라는

 자각을 가지고 자기 자신을 파악할 때그런

 []는 어떤 의식을 동반하고 자기 마음에 나타

 날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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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한 [내 몸], [내 마음], [내 발], [내 오온(

 )] 하는 식으로 자신의 구성 요소를 표현할 때

 그런 []나 [자기]는 어떤 식으로 나타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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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흔히 [나는 병이 났다]거나 [나는 병이

 나았다]라고 말합니다이처럼 [내 몸]이 병들었

 을 때 [나는 병이 났다]라고 표현하고, [내 몸]

 의 병이 나았을 때 [나는 병이 나았다]고 표현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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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제로 병이 나거나 나은 것은 [자체가

 아니라 [내 몸]입니다그런데 보통 우리는 [

 ]도 []라는 말로 표현하는 것을 알 수 있습

 니다.

 하지만 실제의 []는 몸이나 마음을 사용하고 

 있는 소유자이고몸은 []가 사용하고 있는

 내 소유물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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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생각해보면,

 []는 보통 우리가 마음속으로 파악하고 있는

 []로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는 분명 여기에 존재해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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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라이라마의 반야심경의 가르침 51 달라이라마의 반야심경의 가르침  52


 고대 인도의 []에 대한 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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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적으로 보면인도에서는 3천 년 전부터 

 []라는 존재에 대해 여러 가지 분석이나 조사

 가 이루어졌습니다.

 에를 들어, [내가 젊었을 무렵]이라고 말할 때는

 자기 몸과 마음의 구성요소인 오온(五蘊)이 젊고 

 새로웠던 때를 가르키고, [젊다]거나 [늙었다]

 표현은 오온이 싱싱하거나 오래 사용해서 낡은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지, [자체가 젊거나 

 늙은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온이 아직 새롭고 싱싱한 것을

 [나는 젊다]라고 표현하고세월과 함께 오온의

 겉모양이 변하여 낡고 쇠퇴한 것을 [나는 늙었다

 ]고 표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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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사실은 젊었을 때의 []의 모습이 세월

 과 함께 나이를 먹은 현재 []의 모습으로 변했

 을 뿐, [자체의 본질은 젊었을 때의 []

 늙었을 때의 []도 마찬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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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처럼 [내가 젊었을 때], [내가 병들었을 때], 

 [내가 나았을 때]라고 표현하고 있는 []라는 

 주체는 젊었을 때에도 병들었을 때도 병이 나았

 을 때도 똑같은 [자신임에는 변함이 없습니

 .

 하지만 청년기와 중년기를 거쳐 노년기에 이르러

 싱싱했던 오온이 낡은 오온으로 변했을 때오온

 에 따라 젊어 보이거나 늙어 보이는 오온의 소유

 자인 []를 똑같은 []로 파악할 수는 없습니

 나이를 먹었을 때는 젊은 모습을 한 []

 이미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그와 마찬가지로 병이 났을 때의 병든 몸은 병이

 나았을 때에는 이미 존재하지 않습니다하지만

 병이 났을 때 병든 몸의 소유자인 []와 병이

 나았을 때 그 좋아진 몸의 소유자인 []는 같은

 본질을 가진 한 사람의 []로서 존재하지 않으

 면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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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처럼 불교가 성립되기 전의 인도에서는 []


 달라이라마의 반야심경의 가르침 53 달라이라마의 반야심경의 가르침  54


 라는 것이 어떤 존재인지를 활발하게 논의하고

 분석하여결국 몸과는 다른 의미를 가진 별개의

 [], 몸의 소유자로서의 []가 존재한다고 설

 명했습니다.

 이런 결론에 도달한 또 다른 이유는 자신의 전세

 (前世)를 기억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전세를 기억한다는 것은 현세에서의 자기 몸과는

 별도로 전세에서의 몸이 존재했다는 뜻이고같은

 사람이 전세와 현세에서 두 개의 몸을 소유했다

 는 증거가 됩니다.

 이 때문에 오온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 []

 라는 주체가 존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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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교에서 []에 관한 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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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석가세존은 오온과는 다른 의미를 가진

 []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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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는 오온에 의존하여 이름을 부여받은 존재

 일 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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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를 들어한국에서는 <철수>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남들이 <철수 씨하고 부를

 그 사람은 자신의 오온에 의존하여 존재하는

 자신을 철수라는 이름을 가진 []라고 생각합

 니다그리고 다른 사람도 몸과 마음의 구성요소

 인 오온을 가진 그 사람을 <철수>라는 이름으로 

 부름으로써이 사람은 철수 씨라고 인식하고

 있습니다따라서 철수 씨는 그 사람의 오온에